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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민 HEYMIN Oct 27. 2024

버거는 사랑을 싣고

햄버거편 1


홍대입구역 1번 출구 롯데리아.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헷갈리는 묘한 분위기. 앉아있는 사람들 반이 외국인이다.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그 안에 저녁을 해결해야해서 급하게 버거를 떠올렸다. 두 손에 쥔 새우버거를  입 물다가 문득 든 생각,


"나는 왜 다시 버거를 좋아하게 됐을까?"


한동안 멀리했던 음식인데 다시 손이 간다. 왜일까. 예나 지금이나 햄버거는 내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좋아해달라” 한 적도 없고, “미워해달라” 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멋대로 좋아했다가, 싫어했다가, 그리고 다시 좋아하고 있다. 마치 지나간 연애 같은 이 복잡한 감정은 왜 생긴 걸까? 커지는 호기심처럼 새우버거의 풍미도 입안 가득 퍼지고 있었다. ‘뭐야, 새우버거가 이렇게 맛있었나?’


“근데… 사람들은 왜 햄버거를 좋아하는거지?”


나를 제대로 밀고 당기는 햄버거란 녀석.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햄버거의 역사

몽골에서 미국까지


다들 미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햄버거는 몽골에서 유럽으로, 또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음식이다.

영토 확장을 위해 말을 타고 쉼 없이 달리던 몽골 징기스칸. 그만한 체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든든한 전투식량이 필요했다. 그들은 장거리 이동을 위해 고기 익힐 시간조차 아까워 고기를 생으로 먹었다. 땔감도 구하기 힘들 뿐 아니라, 고기를 굽겠다고 불을 피우면 적군에게 나 여기있다고 알려주는거나 다름없었다. 먹다 남은 생고기는 말의 안장 밑에 넣어 보관했다. 이동할 때마다 안장이 움직이면서 고기가 절로 다져졌고 육질도 아주 부드러워졌다.

이후에 몽골이 러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러시아인들까지 다짐육의 정체를 알게 된다. 당시 몽골군의 이름이 ‘타타르족'이라 ‘타르타르 스테이크'라는 이름이 붙는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고기에 다진 양파와 날 달걀을 넣어 육회처럼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17세기 무렵, 러시아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를 오가면서 독일에도 타르타르 스테이크가 전해진다. 그런데 생고기는 아무래도 쉽게 상하니까 항해 중 오래 먹을 수 있도록 익혀먹기 시작했고 그렇게 ‘함부르크 스테이크'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19세기 말, 이 함부르크 스테이크는 독일에서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으로도 전해진다. 미국에 정착한 유럽 이민자들은 스테이크를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들었고, 빵 사이에 고기를 끼워 먹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익숙한 비주얼의 햄버거가 등장하게 되었다. ‘햄버거'라는 이름도 원래 ‘함부르크에서 온 사람 또는 물건'을 뜻하는 말로 당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즐겨봤던 예능 '비정상회담'의 한 장면


이렇게 유럽에서 멀리 건너온 햄버거가 미국에서 대박을 터뜨린 일화에 대해 ‘내가 원조야.’라고 외치는 미국 도시와 가설이 굉장히 많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썰은 어느 박람회장 에피소드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는데, 주문이 잔뜩 밀린 요리사가 빵 사이에 고기패티를 끼어 빠르게 내놓은 사건을 계기로 햄버거가 대중화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계적인 조리법 없이 만들어지다가 1921년에 ‘화이트캐슬’이라는 체인점이 대량의 버거를 팔면서 저렴한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완전한 패스트푸드의 모습으로 완성된 건 1940년대 맥도날드 형제 덕분인데, 이들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 시스템을 마련하면서 빠르게 지점을 확장시켰다.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한국까지 건너온

햄버거의 인기


그리고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 롯데리아가 등장하고 맥도날드가 한국으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도 본격적으로 햄버거와 가까워졌다. 1979년 롯데그룹이 롯데리아 1호점을 서울 소공동에 오픈한다. 뒤이어 맥도날드 1호점이 들어온 건 1988년 압구정이었다. 이 물살을 타고 햄버거는 빠르게 한국 사회에 자리 잡았다. 당시 한국에서 햄버거는 '서양식의 모던한 음식'으로 인식되었고, 특히 맥도날드와 롯데리아 매장은 아이들과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장소로 떠올랐다.


1979년 소공동에 오픈한 롯데리아 1호점
1988년 압구정에 오픈한 맥도날드 1호점


미국에서 한국으로 처음 상륙한 맥도날드가 화제였던 이유는 단순히 ‘미국 음식’이어서가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 외식 시장은 고급 레스토랑이나 한정된 외식업체 몇 개만 주를 이루었다. 맥도날드의 등장은 단순히 외식업체가 생겼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먹는’ 유행으로 여겨졌다. 외식이란 개념이 형성되던 시기와 맞물려 햄버거는 그 자체로 트렌드이자 상징이 되었다. 맥도날드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은 단순히 패스트푸드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곳의 새로운 경험까지 먹고 싶었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팝업스토어를 다니며 도장깨기 하는 마음이랑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버거와 친해진 이야기 :

그 시절 너를 잊지 못해...


맥도날드가 상륙한 1988년 뉴스데스크


이쯤에서 햄버거에 대한 추억을 잠깐 뒤적여 보면, 나 역시 90년대 어린 시절에 롯데리아와 맥도날드를 번갈아 드나들며 자랐다. 당시 우리동네 가장 큰 OO백화점 2층 맥도날드는 단골매장 중 하나였다.

맥도날드 입구에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놓인 아크릴 진열장이 있었다. 안에는 앙증맞은 ‘이달의 장난감’이 전시되어 있었다. 엄마의 쇼핑에 우리 자매가 군말 없이 따라나선 건 다 그 장난감 때문이었다. ‘어린이 버거세트’를 시키면 같이 나오는 장난감. 순수하게 햄버거가 좋아서 먹은 게 아니라, 장난감을 모으려고 먹었다. 패티나 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때부터 버거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매장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장소가 아니라 햄버거와 장난감, 그 조합이 행복을 주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아마 내 또래 수많은 어른들이 비슷한 추억을 갖고 있지 않을까? 지금의 아이들은 한창 진행형이겠지. 햄버거 맛에 잔뜩 눈을 뜨면서.


아이들이 환장했던 맥날 해피밀세트 장남감




버거와 멀어진 이야기 :

우리... 생각할 시간 좀 가질까?


시간이 흐르면서 버거와 나는 서서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어린이세트에 딸려오는 장난감이 더 이상 기대를 주지 않는 나이가 될 무렵, 햄버거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식었다. 십대가 되면서 ‘패스트푸드는 건강에 안 좋다’는 온갖가지 불편한 정보가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때 햄버거는 일종의 ‘불량식품’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마치 한 철 짝사랑이 끝난 것처럼 버거에게 무심해졌다. 어쩌다 먹는 존재. 그저 편의만 남은 음식이 되었다. 아무래도 다시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 같았다. 사춘기였던 나는 안그래도 얼굴에 여드름 꽃이 피었는데 거기에 패스트푸드로 기름까지 붓고 싶지 않았다. 먹으면 여드름이 폭발할 거 같았다. 사회적으로도 햄버거는 더 이상 좋은 음식이 아니었다. ‘빠른 음식’, ‘저렴한 한 끼’ 쯤으로 전락하는 듯 보였다.


비만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방송까지 끊겨버린 버거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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