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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순간의 풍경

구절초 차향기, 리넨 원피스, 성인용 기저귀 

by tea웨이 Mar 22. 2025


대세 배우 박신양이 러시아 유학 와 있다는 멘트를 여행 내내 들었으니 꽤 오래전이야기다. 냉전 끝무렵 긴장감 도는 러시아 여행은 보통 사람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꼭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첫 발령지에서 만든 모임이 있었다. 그중의 한 분이 화가셨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간절했던 그림 유학을 떠나신 참이었다. 그분이 안정적인 유학생활을 하게 되자   지방 촌샘들인 우리에게 제대로 된 러시아를 구경시켜 주려고 우릴 불러냈다. 그러나 우리가 러시아로 도착하기 전   길고도 깊어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모스크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져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한나절을 그 병원에 갇혀서 병문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입담이 좋아 교무실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샘 답게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을 웃겼다.. 그런데

갑자기 쉿.. 하면서 그 화가샘이  병실 한 구석을 가리키며 입을 막았다.

육인실쯤 되는 병실이었는데  언제 왔는지 젊은 여의사 한 분이 작은 꽃병에 화려한 주황색 꽃 한 송이를

꽂아서 누워있는 환자 분의 코에다 대고  편하게 꽃향기를  들이마시기 쉽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대한 나라로 알고 있는 러시아 국립병원의 낡고 누추한 환경에 실망하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약간 녹은 슬었지만

깔끔한 천을 씌운 침대 위에 환자복이 아닌 얇은 흰 리넨  라운지 원피스를 걸치고

신화 속의 천사처럼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 누워있었다. 자세히 보면 통증이 지나칠 때마다 이마에 주름이 그어지는 걸로 보아 나이 지긋한 할머니 임이 분명하지만 언뜻 보면 조막만 한 뽀얀 얼굴과 한쪽으로 느슨하게 머리를 모아 한 갈래로 땋아 내린 모습이 소녀 같은 분. 그분 귀에 대고 연신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를 넣어주고  콧속으로는 계속 향기를 넣어주고.. 무슨 소리였을까.. 사랑한다, 좋은 곳, 밝은 곳으로 가라.. 진흙탕은 걷지 말고 꽂길만 걸어라.. 잘 날아라... 나 혼자서 온갖 상상을 다하면서 내 마음도 그분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빌은 것 같다

꽃병 든 여자는 이곳 병원의 외과의사이며 누워계신 분은 이 의사의 시어머님이라고 했다

어찌나 가슴이 따뜻하고 먹먹했는지 저렇게 임종을 맞이하면 죽음도 무섭지 않겠다고 했다

내 마음속에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임종에 대한 환타지중 최고의 실제로 본 판타지다.





이 판타지에 대한 로망은  숙우회 수업을 듣자마자 곧바로 바뀌게 되었다. 수많은 다법 중에서 

"산향"이라는 

망자를 위한 다법에서  내 마지막 풍경의 로망은 좀. 더 기품 있고 구체적으로 발전했다



"죽음을 향한 내 몸은 자꾸 떨리고 굳어지면서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버티고 있고

 몸에서 막 빠져나온 영혼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풀어주는

 차 한잔의 향기가 절실할 때  녹차향이었으면 좋겠다.


 

 어쩌다가가 아닌  늘 익숙하게 마시던 지리산 구례의 산녹차로.


음악까지 준비해 주신다면 혁오 밴드의 ‘공드리’,  

영혼을 물이 아닌 빛으로 목욕시킨다면      그런 느낌일 것 같은 음악.    


그리고 맨 마지막 향 마무리는  늦가을 유리 다관에서 살포시  연보랏빛 꽃잎으로 피어나서

 모든 세속의 잡냄새를 다 몰아내고 맑고 담백한 향으로 남게 하는 구절초 꽃잎차향.  


무거웠던 생의 무게를 다 덜어내고 구절초 꽃잎차 향처럼 가볍고

맑은 향기만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겨두고 가고 싶어서....

그런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로망은 어디까지나 로망이다


"누나 빨리 좀 와 주어야겠어 "

 아침마다  옆동의 친정엄마 아파트 방문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남동생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전날 오전에 잠깐 통화했는데..

이제 100세가 되지만 아직은 치매도 없으시고 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보행과 거동의 약간     

부작용과 불면증이 있을 뿐이셨는데.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내 이런 상상이 얼마나 오글거리는 내 비현실적인 풍경인지.. 한 사람이 이 생에 오셨다가

 가시는  마지막 풍경은  자매 형제간의 밀당, 요양병원, 기저귀, 간병인, 통장잔고,

죄책감, 슬픔,...이라는 복잡하고 심란한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일임을 절절하게 깨닫는 중이다

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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