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긴 해도 좀 슬프긴 해도 나 왠지 눈물이 나 너무나 달콤해서
(며칠 뒤, 압구정. 희나는 다음주 촬영 관련 팀 미팅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왕작가님께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 겨우 오후 반차를 얻어냈다. 사실 말이 오후 반차지, 해야 할 업무가 워낙 많아 영민을 만나고 나면 다시 사무실로 복귀해야 했다. 상암에서 압구정이라 거리가 좀 있어 서둘러 나온 희나는 그 지난 오랜 세월이 무색하게, 지도 앱도 보지 않은 채 자연스레 발걸음이 카페를 향했다. 주변은 바뀌었지만, 그 때 그 시절 그대로 남아있는 베이커리 겸 카페. 주변에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핫하고 힙하다는 유명 맛집과 카페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지만, 이 곳 만큼은 아직도 이 비싼 압구정로데오 땅덩어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올곶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말 오랫만에 온 압구정입니다. 여기가 집인냥 일주일에도 서너번을 들락날락 거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말 몇 년 만에 다시 찾은건지 모르겠어요. 유명하고 힙하다 하는 맛집들은 다 있던 로데오였는데, 지금은 예전만 못하네요. 뭔가 거리가 썰렁한 느낌이에요. 요즘은 어느 동네가 유명하죠? 사실 전 지금 그런게 궁금하진 않아요. 대체 몇 년만에 연락이 온 영민오빠는 저한테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걸까요? 헤어지고나서 정말 단 한 번도, 술먹고 실수로라도, 새벽 한 시 전남친감성으로 "..자니?" 조차 보내지 않았던 사람인데. 다시는 마주하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제가 오늘 여길 온 건 정말 너무너무 순수하게 궁금해서예요. 전 궁금한건 정말로 못참거든요. 어떤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진짜 절대로 연락할 일 없을 사람이라서, 무슨 말을 할 지 너무너무 궁금해요. 사실 오늘 보기로 한 다음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어요. "영민오빤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드르륵 탁... "영민오빤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드르륵 탁. 계속 이런 느낌이었달까요?
만나면 어떤 표정을 해야하죠 ? 뭐라고 인사말을 건네야 하나요? 지금까지 별다른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이십대 시절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라서. 무색무미의 느낌일수는 없네요. 긴장반 설렘반 궁금증 반으로 일단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잡생각이 끊이질 않더니, 어느새 도착했네요.
(거의 몇 년만에 온건데도, 입구 앞에 서니 희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분을 느꼈다. 출입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한 번 후- 하고 고른 뒤, 슬며시 문을 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약속시간만큼은 칼처럼 지키는 사람이라, 이미 카페 한 쪽에 자리잡고 앉은 영민의 모습을 희나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조금은 세월이 얼굴에 깃든 모습, 하지만 여전히 듬직한 그의 어깨는 그 시절 그대로, 아니 조금 더 듬직해진듯 하다. 체구가 커졌다기 보다도, 그냥 지난 세월이 조금 더 그를 단단하게 만든 듯 했다. 어색한듯 웃는 것도, 정색하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희나는 영민 앞에 앉았다.)
영민 : .. 왔어? 진짜 오랫만이네 그치.
희나 : 그러게. 주변 가게들은 다 바뀐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만 이렇게 그대로인가 몰라. 신기하네.. 하하.
영민 : 그치, 나도 그게 좀 신기하더라구. 주변에 있던 레스토랑이며 카페는 다 바뀌었는데, 이 집만 딱 그대로야. 그나저나 희나 네가 멀리서 오느라 좀 힘들었겠다, 너무 내 생각만 해서 장소를 정했나 싶네 ㅎㅎ
희나 : 아니야. 괜찮아- 뭐, 덕분에 나도 여기 되게 오랫만에 와보게 되었는데 뭐. ㅎㅎ 여기 빵이랑 커피 진짜 맛있잖아. 난 단 거 별로 안좋아해서 이 집 담백한 빵맛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오늘 온김에 이따가 좀 사가야겠다. ㅎㅎ 그나저나 일은, 여전히 그 일 그대로 하고 있어?
영민 : 응 뭐 , 나야 그렇지. ㅎㅎ 근데 사실 슬슬 정리하고 있기는 해. 오늘 연락한 이유도 사실 이거랑 좀 연관있기도 하고.
희나 : (안그래도 물어보려 했는데 영민이 먼저 자연스레 말을 꺼내줘서 고맙다 느낀다) 아 응, 그러니까- 진짜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ㅎㅎ 오빠가 별 거 아닌걸로 나한테 연락하진 않았을거라서. 왠일인가 싶긴 했어. 무슨 일이야 ?
영민 : 아 응.. 아, 맞다 이런. 일단 너 마실것부터 좀 시키자 ㅎㅎ 근황 묻는다고 마실것도 아직 주문 안했네. 예전 그대로 꿀아이스티 ?
희나 : 아 응, ㅎㅎ 그치. 여긴 꿀아이스티를 마셔줘야지. 응 그걸로 할게.
영민 : 잠깐 있어, 얼른 주문하고 올게.
(영민은 카운터로 가서 꿀아이스티 한 잔을 주문했다. 이전 희나의 취향을 여전히 기억하는 영민은 원래도 그렇게나 세심한 성격이었다. 사람이 소란스럽지 않고, 무던함 그 자체.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 성격이든 전부 다 잘 어울리는 포용력. 누구와 대화를 해도, 어긋남 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영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영민의 성격이 다시금 희나는 떠올랐다. 꿀은 반만, 얼음 가득해서 주세요- 라는 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세세하게도 기억하고 있다. 사람이 어쩜 저리 한결같을까- 라고 희나는 생각했다. 오랫만에 봤어도, 어색할법도 한 사이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영민 특유의 무던함 때문인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을 마친 영민이 자리로 돌아온다)
영민 : 꿀은 반만, 맞지?
희나 : 응 맞아. 아니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걸 기억해? 오빤 진짜 기억력이 참 좋다.
영민 : 뭐 기억력이 좋아서라기 보다도. 희나 넌 늘 가는 곳마다 먹는 메뉴가 정해져 있으니까. 기억하기가 쉽지.
희나 : 그런가. ㅎㅎ 그나저나, 그래서 무슨일인데. 오빠가 나한테 연락할 정도면 그냥 단순히 안부 물으려 연락한건 아닐테고.
영민 : 그치. ㅎㅎ 조금.. 뭐랄까, 감히 너한테 이런 부탁을 해도 되나 싶기는 한데..
희나 : 뭔데 그래. 나 궁금한거 절대 못참는 거 알면서 그래. 말해봐, 일단 들어나 볼게.
영민 : 희나야. 나 미국 가. 한 3년 정도 갈 거 같아.
희나 : ... 미국 ? 미국을 간다고 ?
영민 : 응. 미국. 가 , 드디어. 아니지, 드디어- 라는 표현은 네가 듣기에 좀 우스울려나. 하하.. 마침내 결심이 섰어. 다음 달에 나가.
희나 : 아니 오빠, 어.. 음.. 그러니까, MBA.. 하러 간다는거야 지금?
영민 : 응. 그렇지? 여행이라기엔 5년은 좀 긴 거 아닐까?
희나 : 그게 농담이야 지금?
영민 : 이게 농담이지 그럼. 하하.
희나 : ... 왠일이야? 그렇게, 그렇게 가라고 등떠밀때는 안가더니 이제와ㅅ.. 아니지. 하.. (한숨을 몰아쉰다) 그래도, ... 그래. 잘됬네. 과정이야 어땠든, 아무튼 오빠가 드디어 간다니, 이걸 듣고 있는 내가 다 꿈 같네.
영민 : 그렇지 ? 나도 비행기 타서 미국땅 밟기 전까지는 거짓말처럼 느껴질 것 같아.
의아했어요. 왜 갑자기 결심을 바꾼걸까요. 그렇게 나가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응원해줄때만 해도 절대, 절대 이 대한민국땅은 벗어날 생각이 없던 사람이. 왜 이제야, 아니 이제라도 마음 먹고 떠난다니 다행인걸까요. 원하던 길이고, 그 뜻을 이루었으니 응원하는 마음이 들어야 응당한데, 왜인지 제 마음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얄밉기도 하고, 괜시리 속이 시큰거리기도 해요. 내가 그렇게 응원했는데, 그 땐 진짜 대한민국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지구종말 올 것 처럼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더니. 그렇게나 내가 응원했는데도, 본인이 나서서 가질 못한 것을. 오롯이 여자 하나 잘못 만나 우리 아들 큰 뜻도 펼치지 못한다고 책망의 소리조차 제가 대신 다 들었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나 큰 뜻 펼쳐야 하는 사람, 많이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때.문.에. 그 사람 앞 길 막는 것 같아서, 그렇게 다투고, 울며 불며, 결국은 서로 각자 갈 길 가기로 했는데요. 이제와서 간다니요. 정말 제가 영민오빠의 앞길을 막았던 여자였을까요. 전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일단 이야기를 마저 들어봐야겠어요.
희나 : 그래.. 그렇게나, 안간다고 하더니. 어떻게 결심이 섰네? 잘됐다. 늦었을때가 늦은거라고, 늦게나마 마음먹은만큼 가서 잘하고 와.
영민 : 응.. 그렇지. 희나 네가 참 많이 믿고 응원해줬었는데... 그 때의 기억으로, 지금에라도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건가봐.
희나 : 그런 말이 어디있어. 그냥 오빠 혼자만의 오롯이 해결해야 할, 나아갔어야 할 길이지. 난 오빠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자였는걸 뭐. (희나는 괜시리 시큰거리는 마음에, 하지 말아야 할, 할 필요 없는 말을 내뱉어버리고 만다.)
영민 : 희나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때도 그랬지만, 그건. 그냥 어머니가.. 어머니 인생엔 너무 내가 전부인 분이시라.. 순간 말이 너한테 헛나간ㄱ..
희나 : 헛나간거라고? 그 말이? 헛나간거야? 나한테? 하.. 그래. 어머니한텐 오빠가 인생의 전부이시지. 어머니도, 오빠도 참 여전하시고, 여전하네.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그때던 지금이던, 누구의 덕이든 탓이든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영민 : ....
희나 : 그래서, 미국 가는거 자랑하려고 나 나오라고 그랬어? 대체 나한텐 연락을 왜 한거야?
영민 : 그게.. (영민이 숨을 한 번 고르고, 긴장한 듯 희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뗀다.) 식사, 한 번만. 같이 할.. 수 있을까?
희나 : ..??? 뭐 ? .. 뭐라고 ? 식사? 오빠 지금 나한테 밥먹자는거야?? 뭔 밥. 무슨 밥?
영민 : ..... 우리 어머니랑 말이야.
희나 : .... 지금 내가 귀가 멀은거야, 아님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다 꿈인거야. 어우 이거 꿈인거면 빨리 정신차려야 겠다 뭔 꿈이 이렇게 개꿈이래.
영민 : 꿈 아니야 희나야. 나도 진짜 내가 생각해도 얼척없는 부탁인거 알아. 그런데, 한 번만 부탁 좀 들어줄 수 없을까..?
희나 : 오빠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거야? 오빠 입에서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건지, 오빠 귀로도 듣고 있는거냐고 지금. 어머니? 어머니랑 식사를 같이 해달라고? 제정신이야? 우리 왜 헤어졌어? 어머니때문에 헤어졌던거 아니야? 그런데 뭐 ? 어머니랑 식사를 하자고?? 아니 내가 지금 진짜 무슨 말을 듣고 있는건지를 모르겠네.
애틋함인가 설레임인가 모를 묘한 기분에, 제가 오늘 영민오빠한테 느끼는 이 감정이, 사실은 그라데이션 분노로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던거였을까요. 지금 제가 도통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헤어짐의 원인이었던, 만나는동안 절 그렇게나 힘들게 하셨던 분인데.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드는 저인데.. 사람은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좋은 것만 기억한다더니 그 말이 저에게 딱 맞네요. 잊고 있었어요. 이 사람, 하늘이 두 쪽 나도 영원히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할 아기캥거루라는 사실을 말예요.
"주문하신 꿀아이스티 나왔습니다-"
오빠가 아이스티를 가지러 갑니다. 다정하게 빨대까지 꽂아서, 잔이 미끄러지지 않게 밑에 코스터까지 받쳐서, 제 앞에 놓아주네요. 한 대 맞은 것 같은 멍한 기분으로 꿀아이스티를 한 입 쭈욱 빨아들입니다. 이게 지금 무슨맛인지도 모르겠어요. 꿀 맛이 나기는 하는건지, 아이스티인건지 보리차인건지 당최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어요.
(속이 답답했는지 한 입 쭈욱 빨아들인 아이스티는 이미 반이 사라지고 없다.)
희나 : ... 오빠. 나한테 한다는 부탁이 이거였어? 어머니랑 식사를 하자고,? 왜? 대체 왜 내가? 아니 진짜 무슨 이유로?? 세 사람이 밥 먹으면 셋 다 체할 것 같은 식사자리를 대체 왜 만들려고 하는거야.
영민 : 희나야. 진짜 나도 수십번을 고민했어. 이걸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렇게나 염치없을수가 없는거야.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은거야. 그래서 몇 번을 말자고, 그러자고 생각했는데...
희나 : 아니, 그런 말 말고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라니까 오빠? 대체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온거냐고. 미국가기전에 뭐 화합의 장 같은거라도 만드는거야? 오빠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자리를 만드는거야?
영민 : 희나야. 우리 어머니가.. 아직도 내가 널 만나는 줄 알고 계셔.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제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걸까요. 아니 그래 오늘 오는 길부터 좀 이상하다 했어. 그렇게 길 잘 헤매고 정신머리 없는 내가, 아무리 몇 년 만이라지만 지도 앱을 켜지도 않고 한 번에 여길 찾아온 것부터. 그래요 이게 현실일리가 없다 생각했어요. 몰랐는데, 지금 저만 너무나도 생동감과 현실감이 넘치는 꿈을 꾸나봐요. 대화를 하고 있고, 말을 듣고 있는데, 그 어떤 문장도, 단 한 문장조차도 이해되는 말이 없어요.
영민 : .. 그게 무슨 소리냐 싶지.. 그래. ㅎㅎ 몇 년 만에 나타나선, 갑자기 미국간다. 어머니랑 밥먹자. 내가 봐도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런데 희나야. 진짜야.. 어머니가 아직 내가 널 만나는 줄 알고 계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의 시간 속에서는 아직 우리가 연인이야. 그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 치매, 증상을 앓고 계셔.
...
?
뭐라고? 치.. 치매..? 그 강경한 어르신이, 치매? 치매라고?
희나 : ... 뭐? 오빠, 어머님이 지금, ... 뭐??
영민 : 2년전부터, 자주 깜박하시는 것 같더니. 지금은 조금.. 조금 심해지셨어. 너도 알잖아 우리 엄마. 뭐 하나 선 하나라도, 점 하나라도 어긋나는거 못보시는 대쪽같은 성격이신거. 근데 그런 어머니가.. 벌을 받으시는건지, 다른 것도 아니고.. 치매시래. ㅎㅎ.. 나도 안믿겨. 매일 매일이 거짓말 같고, 그냥 나야말로 하루 하루가 꿈 같았어. 그런데, 나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데.. 어머니가 널 찾아. 왜 요즘은 널 데리고 오질 않냐고 하셔. 몇 번을 애둘러 변명하고 거짓말해서 넘겼지. 너 일도 바쁘고, 요새 지방 출장도 잦고. 근데 그 거짓말이 거의 1년이 다되어가다보니까. 어머니가 처음부터 그러신건 아니었거든. 그냥 깜박깜박 하시다가, 가끔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잊으시다가,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머니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는거야. 희나는? 가족 모임 하는 날이면, 희나는 왜 안데려왔니? 걔 요즘도 바쁘다는 핑계 대는거니? 하시면서말야.
희나 : 거짓말. 진짜 애기도 오빠보단 거짓말 잘하겠다. 보기만 해도 싫어서 어쩔 줄을 모르시던 분이 날 왜 찾아? 뭔가 좀 더 그럴싸하게 말을 지어내봐. 오빠 거짓말 소질 없는 건 나도 잘 아는데, 그래도 좀 더 성의있게 거짓말을 해야지.
영민 : 나도 의아하고, 아버지도 너무 의아해하셔. 몇 번을 아버지랑 둘이서 이래저래 핑계댔는데, 요 몇 주 계속 너무 심할 정도로 희나 널 찾으셔. 어머니가 너한테 하시고픈 말이 있는데, 대체 데려오라는데 왜 안데리고 오냐는거야. 나한테 말씀하시라고, 내가 전하겠다고 해도, 죽어도 고집을 안 꺾으셔. 자꾸 너한테 직접 전화해보시겠다는걸 계속 뜯어말리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그래서. 안될 거 알면서도.. 한 번 부탁이라도 해보려고.. 그래서 전화한거였어.. 희나야. 나도 당최 이유를 모르겠어. 그런데 진짜 딱 한 번 만.. 한 번만 부탁 들어주면 안될까?
희나 : ...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게 맞는지도, 옳은 건지도 모르겠다 오빠.
영민 : 너가 절대 싫다고 하면 나로선 어쩔 수 없어. 알아. 그런데도 희나야. 진짜 한 번만, 부탁할게. 정말 한 번만.. 어차피 나 미국 나가고 나면, 다시 너 찾으실 일도 없을거야. 아픈 사람이니까.. 염치없지만 한 번만 부탁할게 희나야. 저녁 딱 2시간만. 딱 2시간만 시간 좀 내줘. 내가 정말 이렇게 부탁할게. 알잖아. 나 너한테 그 어떤 부탁도 절대 하지 않는 거.
네 알아요. 만나던 당시, 전 참 그게 또 그렇게 싫었어요. 이 사람은 옷깃에 묻은 먼지 하나 터는 것 조차, 작은 부탁 하나조차도 저한테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게요. 그정도로 난 이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늘 묘한 벽이 있었어요.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없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미묘하고 얇은 유리벽이 하나가. 늘 우리 사이엔 있었어요. 그런 사람인데, 헤어지고 몇 년 만에 나타나선 처음 한다는 부탁이, 자기 엄마를 만나 밥을 먹어달라네요. 무슨 부탁을 해도 이런 부탁을 하나요.
희나 : 알아, 그래서 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말야. 100원짜리 하나 사다달라는 부탁조차 않던 사람이,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헤어지고 몇 년 지나서 처음으로 한다는 부탁이라서. 그래서 나도 내가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희나는 궁금했다. 얼굴을 볼 때마다 날 그렇게 힘들게 하시던 분이, 치매까지 걸리셔선 왜 대관절 갑자기 희나는 찾으시는걸까. 어딜 가도 사람들에게 미운 눈길 한 번 받아본 적 조차 없는 희나인데, 영민의 엄마만은 달랐다. 그냥 처음부터 희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알싸하고 약간은 소름돋게, 희나가 영민과 함께 있는 앞에선 방긋 웃으면서도 그렇게 희나를 참으로 꼬아 보고, 참으로 싫어했다. 영민을 너무 좋아했던 희나이기에, 그리고 어른들은 당연 우리네와 시선과 생각이 다르실 수 있고, 그마저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니,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수도 없이 노력해왔던 희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나와 영민의 만남은 끝이 생겨버렸고, 그 이후 희나는 많이 아프고,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 미운 눈길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같이 찾아 왔었다.)
영민 : .. 안될까 ?
희나 : .. 애초에 어머님이 아프신데 오빤 왜 지금 MBA를 하러 미국을 간다는거야. 아니 그 어느 것도 이해도 되지 않고 상황에 맞지도 않아. 이럴거면 그냥 그 때 가지 그랬어. 진즉 다 끝내고 한국 들어왔겠다.
영민 : 알아 나도.. 그냥.. 그때 갔었음, 지금쯤 차라리 더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내가 수발들고 하면 될텐데. 이제라도 가려는건, 어머니 치료 목적도 있어서야. 일단 미국 이야기를 먼저 꺼낸건 어머니이시고.. 누나랑도 깊게 상의해봤는데, 어머니 치료로 미국이 환경이 더 좋아서, 겉으론 내 공부를 목적으로 표면에 두고,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함께 나가려고 해. 지금은 아직도 완강하신 어머니 때문에 회사는 어머니가 하고 계시지만, 어머니 모르게 뒤에서 누나랑 내가 도맡아서 보고 있고, 결국은 싫으나 좋으나, 이 회사를 맡아서 할 사람은 나라는거야. 어머니 치료도 너무 절실하고, 회사 경영에도 내가 좀 더 깊이있는 공부가 필요하니, 누나가 한국에서 회사를 맡을 테니 어머니 모시고 미국을 나가라는거야. 아버지는 미국과 한국을 왔다갔다 하실거 같고. 그래서 진짜 이게 마지막 부탁이라는거야. 하루에도 삼세번씩 널 찾으셔. 그냥 한 번 만나뵙기만 해 줘 이렇게 부탁할게.
희나 : 하........................ 내가 너무 익숙한 삶의 다람쥐 쳇바퀴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가, 오늘 지금 이 한 시간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에 들은 정보가 너무 방대하고, 당황스럽고, 이해도 안되네.. 일단, 내가 생각을 좀 정리좀 해보고.. 그러고 나서 오빠한테 다시 연락할게. 오래 걸리진 않을게. 그래도, 나에게도 최소 하루이틀은 생각할 시간이라는 걸 줘.
영민 : 응 알았어. 생각해주는 것만 해도 사실 감사해. 절대 널..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않지만.. 그래도, 부탁을 할 수 밖에 없는 내 처지를.. 들어줘서 고마워 희나야.
희나 : 오빠, 나 너무 머리가 아파서 기운이 없다. 이만 자리 일어나도 될까?
영민 : 아, 응. 그래. 가야지 - 회사도 다시 들어가야 하는거 아냐?
희나 : 어, 맞네.. 와.. ㅎ 나 회사 다시 가야하는것도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어. ㅎ 머릿속이 터질 것 같네 진짜..
영민 : 빵 가져가. 너 좋아하던 것들로 아까 같이 주문해서 포장해달라고 해뒀어.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가지고가. 그리고 택시 잡아줄테니까 택시 타고 가고. 내가 데려다 주면 좋겠는데, 나도 일 중간에 갑자기 나온거라서.. 데려다 주진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시간 내 준 것도 고맙고.
희나 : .. 응. 타고 갈게, 택시. 나도 도저히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는 못가겠다 지금은. 생각해줘서 고마워.
영민 : 아냐 내가 고맙지,, 일어나자. 정신없이 쏟아지는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희나야.
희나 : 응. 고마워해. 진짜 지금 머리 터지겠다 나.
(희나와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선다. 시간은 아직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다. 해가 쨍 하고 머리 위에 떠서, 앞으로 걸어가는 길 조차 눈이 부셔 눈을 똑바로 뜨고 걸을 수가 없었다. 희나에 손엔 희나가 좋아하는 빵들이, 영민이 사준 빵들이 들려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어떤 빵부터 먹을지 설레이며 봉지를 뒤적거리며 걸을 희나인데,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회사고 뭐고, 왕작가님이고 뭐고 간에 지금은 그냥 집에 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눈을 감고 잠들어버리고 싶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다.)
(그 때, 희나를 위해 영민이 불러 준 택시가 도착했다. 무려 카카오 벤이다.)
영민 : 아; 일반 택시가 잘 안잡혀서.. 너 얼른 들어가야 하잖아. 가는거라도 좀 편히 가라구. 조심해서 가. 연락.. 기다릴게. 너의 결론이 어찌 나던지간에.. 알려만 줘.
희나 : .. 응 알았어. 연락 줄게. 오빠도 조심히 가고.
영민 : 희나야.
희나 : 응 . 왜,
영민 : 꿀아이스티 들어가는 꿀 말야. 궁금하면, 나한테 물어봐. 알았지?
희나 : 뭐?
영민 : 사실 네가 궁금해했던 첫 날, 너 화장실 간 사이에 내가 물어봤었거든. 근데 그 이후로도 네가 몇 번이나 궁금해 하면서도,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했잖아.
희나 : ... 정말이지 이 사람. 기억력 하나는 정말 미친 사람이네. 그걸 여태 기억해, ?
영민 : 그냥, 갑자기 떠올랐어. 네가 아이스티를 한 번에 반 이상 원샷하는거 보면서. ㅎㅎ 물론 나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서 시원한 게 당긴 것 같아서가 이유인 것 같지만.
희나 : 쓸데없이 날 너무 잘아네.. 맞아. 속이 타들어가는것 같아서 아이스티라도 때려 부어야겠더라구. 꿀은, 말해주지마. 여전히 모르고 싶으니까. 간다-
(희나가 탄 택시가 떠난다. 그 모습을 몇 초간 바라보던 영민은 씁쓸하게 한 번 웃음 짓고는 뒤돌아서 그 자리를 떠난다.)
(7년 전. 같은 압구정로데오의 카페. 모임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둘은, 결국 반 년이 지난 어느 날인가부터 연인이 되었다. 다정하게 카페에서 데이트 하던 어느 날.)
희나 : 오빠, 진짜 여기 꿀아이스티는 다른 데서 먹어볼 수 없는 맛이야. 이 꿀, 그냥 국산 꿀 아닌거 같지? 그치? 매번 먹을때마다 신기하고 궁금하단 말이야.
영민 : ㅋㅋ그래? 우리 희나 입맛이 여간 까다로운게 아닌데, 희나가 그렇다면 진짜 그런가보다. 근데 희나 너 먹을 때마다 이 말 하네. 그냥 물어볼까? 사장님한테? 어떤 꿀 쓰시냐고?
희나 : 아니! 물어보지마. 절대 끝까지 모르고 싶어!! 알면 이걸 마시는 재미가 덜 할 것 같단 말이야. 꿀아이스티 먹을 때마다, 아- 이거 대체 무슨 꿀이지? 어느 나라에서 온 달콤함인걸까? 하고 상상하면서 먹는 그 재미도 이 꿀아이스티 맛에 같이 들어 있다구-!! 절대, 절대 말해주지마 !! 절대적으로 난 모르고 싶어!!
영민 : 하하 그래? 알았어 안 물어볼게. 아니 혹시라도 내가 사장님께 듣게 되더라도, 희나한텐 말 안할게. 희나가 알려달라고 할 때 까지.
(영민은 자켓 안주머니를 살포시 잡았다가 스르륵 힘을 푼다. 이 꿀을 언제쯤 희나한테 줄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영민도 꿀아이스티의 맛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 땐 몰랐다. 힘들게 힘들게 해외직구로 구한 그 꿀을, 그 꿀을 딴 꽃이 들어있는 원석으로 만든 반지를, 끝끝내 희나에게 줄 수 없었음을. 영민은 알지 못했다.)
잠시 눈을 감고서, 꿀 같은 향기를 들이 마셨을 때 -
내 볼을 적시는, 한 방울 두 방울,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기분을 따라 - 이상하긴 해도, 좀 슬프긴 해도,
나 왠지 눈물이 나.
너무나 달콤해서
너무나 달콤해서 ㅡ
- BGM. 우효, 꿀차 中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