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12
타인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것이 자유 중에서도 적어도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된다면, 그래서 나는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부단히 노력 중인가 보다. 그 이유 탓에 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밑바닥에서만 숨을 고르고 있으며, 위쪽을 동경하면서도 위쪽의 세계와 나 사이의 연관성을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할 거라고 결론을 지으며 살아왔다. 그런 위쪽의 가치들은 솜털보다 가벼운 것들이었으나, 나는 그런 가벼운 속성들에게조차 자주 굴복당하며 강박적인 삶을 살았을 뿐.
마치 거창한 이야기라도 꺼낼 듯이 무겁게 글을 열었지만, 솜털처럼 너무나 가벼우며 나만 심각할 뿐, 다른 사람에겐 지극히 사소한 소제에 불과하다. 이 이야기를 과연 꺼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굳이 글로 옮길 만큼 화제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놓고 3주 전부터 나 자신과 갑론을박을 펼쳤다면 과연 거짓말처럼 보일까?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지금부터 중학생 시절 시작되어, 줄기차게 내 일상을 가로막았던 어떤 사소한 루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무겁고 두려우며 오래도록 시야를 가로막은 루틴은 준비성이라는 단어에 숨겨져 있다.
중학교 3학년쯤 됐을까. 순전한 호기심 때문에 면도를 시작했다. 그래, 30년 넘게 나를 괴롭혔던 건 바로 도루코 면도기에서 시작됐다. 수염이 자라나는 성인 남자라면 면도는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자연적인 것, 그러니까 남자로 변신하는 일반적 과정이겠지만, 나에게 뭐랄까 다소 심각한 양상으로 펼쳐졌다고 할까. 면도만 35년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에서 쉬는 날이 아니라면 아침에 반드시 거쳐야 할 어떤 신성한 의식이 된 지 오래다.
완벽한 루틴으로 굳어진 지 오래됐지만, 피부가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수염을 제거해야 하는 건지 의심이 들 때가 많았다. 나도 남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피부를 드러내 놓고 외출할 수는 없는 걸까. 다소 지저분하게 전개되거나, 정신 승리한다면 조선시대의 장군처럼 보일지도 모르니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이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걸까. 도대체 왜 나는, 따뜻한 물과 셰이빙 폼을 차분하게 얼굴에 바르고 얼굴이 매끈해질 때까지 면도기를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왕복 운동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만족하게 되는 걸까. 몇 번의 지루한 반복을 거쳐서 피부에서 거칠거칠한 감촉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니까 거울에 비친 얼굴에서 수염의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 면도에 집착했던 걸까.
모든 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강박증에서 시작됐다. 문 앞 작은 슈퍼마켓을 찾게 되더라도 나는 이 지루한 과정을 생략할 수 없었다. 원인은 자신감 부족이었거나 어쩌면 열등감 때문이었으리라.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타인이 나의 신체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점수를 매길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오랫동안 민낯을 드러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가로막힌 채 살았고 미래에도 마찬가지 일 것 같았다.
면도는 나를 내어놓기 위해 세상에 허락을 받는 과정이었다고 할까. 다소 불편할지라도 그 과정을 견디면 보다 깔끔하고 정돈된 인상을 전달해 줄 거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내가 면도를 게을리할 수 있었겠나. 새벽에 일어나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눈이 벌겋게 충혈되더라도 욕실 앞에서 경건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잔털까지 모조리 정리하면 피부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정리된 기분에 빠져, 누군가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졌냐고 환하게 웃으며 물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 존재하지도 않을 사실을 신봉하며 지긋지긋하도록 면도에 시간을 투자했으니까. 하루 15분, 35년 그러니까 19만 분 가까이를 면도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15분에 책 30~40 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고 계산해 본다면 대체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데없는 작업으로 소비해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 사소한 두려움, 소모적인 루틴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였을까. 애석하게도 아니다. 코로나 덕분에 면도에서 해방되었다고 할까. 올 초부터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 마스크는 일상이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단 1분도 걸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이제 마스크 뛰고 조깅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제 마스크 없이 외출을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됐다. 마스크를 쓰는 행위가 폐활량을 키워주는 효과와 더불어 또 하나 긍정적인 효과는 얼굴의 대부분을 가려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마스크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면도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진출하지 못했던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가벼운 마스크 덕분에, 몇 천 원짜리 얇은 헝겊 조각 때문에 마치 방어막이 하나 얼굴에 새롭게 입혀진 결과를 얻었다고 할까.
마스크 덕분에 자유를 얻은 내 얼굴은 모처럼 화사한 표정을 지었으나,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러니까 모순적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자유를 얻는 길이란, 외적인 페르소나 한 가지를 추가함으로써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나는 숨고 싶다. 보다 안전한 방법이 있다면, 얇은 헝겊 조각에라도 의지하고 싶다. 손바닥 하나의 너비만으로도 완벽하게 가려질 수 있다면.
변화는 아무것도 아닌, 마음의 변심이나 지극히 사소한 강요로부터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마스크 뒤에 숨는 행위로써 나는 약간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는 변화에 대한 욕망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마스크 없이도 바깥세상에 나를 내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까지 품어본다. 그래서 나에겐 주문이 한 가지 필요하다. 마스크가 필요 없어지는 세상에서도 내 얼굴에 커다란 마스크가 씌어있다고. 투명한 껍질 하나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이도록 장치해 줄 거라는 주문을 외워본다면 더 이상 마스크에 기대지 않고도 나는 타인을 의식하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어차피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없다. 오직 나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강박관념, 타인의 시선 신경 쓰기, 원인도 없는 두려움이라는 외피를 걷어치울 수 있으리라. 단 하나의 주문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