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면 비로소 찾아지는 것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11

버리면 비로소 찾아지는 것들


출장을 떠난 사람들 덕분에 요란하던 사무실이 꽤 차분해졌다. 나는 고요함이 참 반갑다. 일을 덜해도 그러니까 덜 미쳐있어도 용인될 것 같았으니까. 그런 낯설면서도 반가운 하루도 마감되어 갔다. 마감해야 할 일들을 오늘 안에 다 끝낼 수 있을까. 할 일 목록에 적힌 일들을 주판알 튕기듯 요리조리 옮겨보다 턱을 괴다,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지만, 특급, 긴급, 보통 따위를 의미하는 숫자가 파도치듯 너울거렸다.


평소보다 이른 4시에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일하기 싫었으므로, 일이 귀찮아졌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다른 곳으로 이미 떠나겠다고, 빨간색으로 무장한 할 일 목록을 무시한 채, 분주하게 채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백팩을 주섬주섬 챙길 뿐이었다. 맥북, 스마트폰 충전기, 고프로, 전원 코드 따위를 돌돌 말아 파우치에 포장하고 다시 백팩에 넣었다. 아주 묵직했다. 몇 십 년 묵은 책임감이 어깨를 휘감았다. 그럼에도 나는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걸으려 애썼다. 다만 옆에서 누군가 손을 덥석 잡아주면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했지만.


"먼저 들어갈게요." 짧은 인사를 던지고 사무실을 나왔다. 시간을 확인했다. 4시 5분, 에스컬레이터 위로 올라서자 중력에 따라 육체가 요동했다. 진동이 미약하게 몸에서 흘렀다. 한 번 울컥 거리더니 두 번째는 더 강하게 흔들거렸다. 건물의 무게일까, 어떤 에너지의 흐름일까, 몸이 통째로 울렁거렸지만 나는 모든 걸 흡수했다. 자주 들리는 1,500원 아메리카노 카페에 들렸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어색하고도 무거운 그러니까 가을을 닮은 음성이 고요를 흩트리려 했다. "네 감사합니다. 핸드폰 번호 입력해 주세요." 밝고 가벼운 음성이 아메리카노에 입혀졌다.


아메리카노 입구를 향해 뜨거운 공기를 후후 불어댔다. 차갑고 더운 공기가 동시에 조화를 이루었다. 하릴없이 벤치에 앉아 고개를 하늘로 치켜드니 하얀 구름과 먹구름이 빈 시간을 꽉꽉 채웠다. 더 채울 필요도 없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은 제 역할을 해냈다. 하늘에서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느티나무, 은행나무들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하얗고 파란 하늘, 벌겋게 고개를 숙인 단풍 들 사이에서 나는 두 가지 색상이 혼합된 노란색으로 익어갔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단풍 드는 날>에서


버스 몇 대가 지나갔고, 시간은 담쟁이처럼 올곧게 어떤 절정의 순간을 향해 줄기차게 넘고 또 넘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 했다. 나는 자연계에 계속 고정되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지만 눈을 뜨면 나는 다시 의식을 환기하고 최종 목적지를 더듬어야 했다. 그때, 멀리서 천천히 바퀴를 구르는 휠체어 한 대가 보였다. 여린 손에 의지해 어디론가 서서히 움직이는 휠체어 바퀴를 나는 마치 가을을 회상하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휠체어가 멎은 건 버스 정류장 부근이었다. 베이직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는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에 얼굴로 가까이 다가서기도, 서성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아, 버스를 타야 하는구나. 꽤 곤란한 상황을 겪겠구나." 그런 직감이 잉태되고 소멸되기를 얼마 동안 반복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두 사람이 버스를 타는 걸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처에 깔린 나뭇잎을 자박자박 밟아 보기도 하고 스르륵스르륵 스치는 소리를 괜히 내보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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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도착했다. 그들이 타야 할 버스인 모양이었다. 저상버스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사실 단어가 품은 속말이 무엇인지는 그 순간까지는 제대로 몰랐다. 그들이 버스에 올라야 하는 순간, 나는 그 단어의 정체가 무엇인지 얼핏 이해가 되었다. 버스에 먼저 오른 나는 뒷문 근처에서 시스템이 느리게 작동하는 걸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아래쪽에서 어떤 장치가 아래로 느릿느릿 이동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멈춘 시간을 살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들의 표정엔 온기가 담겨 있었다. 지극히 평온했으며 잠시의 수고스러움일랑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 아무튼 가을과 썩 닮은 표정들이었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 경과됐고 휠체어와 여자는 버스에 가까스로 올랐고, "죄송합니다." 어색한 말이 여자의 입에서 너무나도 쉽게 흘러나왔다. "왜 죄송해야 하죠?"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을 뻔했으나, 그런 말을 입 밖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공기의 질서가 허물어진 건 분명했다. 속으로 죄송하다는 의미를 계속 생각했다. 두 사람은 어떤 죄를 지었던가. 버스에 존재했던 사람들도 나도 죄 없이 사는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을 단죄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알맞게 익은 가을을 나눠 가졌을 뿐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여행하길 기원했다. 목적지가 분명한 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어디로 가야 할지 중간은 흐릿해도 어쨌든 닿을 곳이 있다는 얘기니까. 그런 기분은 보통 만족을 선물한다. 난 머릿속에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득 품다, 그만 내릴 곳을 잃고 말았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몇 개의 숫자를 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벨을 눌렀으며 천천히 보행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나 역시 더디게 내렸다. 물론 낯선 곳이 기다랗게 펼쳐졌다. 그곳이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마음은 어지럽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길을 잃지 않을 테고 방향이 흐트러질지라도 결국 목적지를 찾아갈 테니까. 윤동주의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시처럼 나는 가끔 길을 잃겠지만 오늘처럼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이유 없는 자신감도 존재하니까.


길은 환하게 열려 있었다. 왼쪽으로 걸어도 오른쪽으로 걸어도 문제는 없었다. 누군가를 따라잡으려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길을 배우지 않아도, 단지 내 길을 개척하면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빨갛게 익었다. 길가에는 노랗고 벌건 이파리들이 물결을 이뤘다. 그것들은 내 마음처럼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나는 그 운동에 따라 걸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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