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더 얼마나 크게, 오랫동안 돌아야 할까

더러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1

지나간 시간들에게 고하는 말


퇴근길 지하철, 빈 의자에 앉아서 나는 주변을 감도는 불길한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나는 어제까지 안전했듯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줄기차게 안전할 수 있을까. 나날이 늘어가는 확진자들, 그 숫자들이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안심할 수 있을까. 주변을 돌아봤다. 모두가 정숙하게 마스크를 얼굴에 두르고, 공포심이라고는 일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두려움의 기세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일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닐 거야, 설마 그럴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집으로 무사히 돌아와, 그러니까 바이러스가 내 몸에 이미 침투했을지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어쨌든 나는 의무적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지나가버린 하루를 파헤치고야 말겠다는 어떤 욕망에 휩싸였지만, 이내 커다랗고 어두운 모양, 어떻게 보면 태풍을 닮은 존재에게 위협당하고 말았다.


모두가 야단법석이었지만, 태풍은 큰 상처를 남기지 않고 떠났다. 어마어마한 녀석이 지나갈 거라고 단단하게 대비를 해야 할 거라고 모두가 겁을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안일한 생각과 막연한 공포 두 가지 감정이 교차됐다. 설마 별일 있겠어,라는 짐작이 유효하게끔 별다른 일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안일한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그러니까 내 생활 반경에 아무런 영향도 상흔도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갔으므로 나는 여전히 안전했다. 하지만 어젯밤 창문을 때린 태풍의 회전력과 휘몰아침, 강력했을 태풍의 위용을 생각하니 잠시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태풍은 왜 회전을 하는 것일까. 과학적인 원리를 규명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새벽녘에 지독한 바람이 창문을 연거푸 세게 흔들어버리는 소리에 놀란 나머지, 찾아온 생각이 전부였다. 왜, 돌아야 하는 건데? 그리고 대체 어디를 향해 가는 거냐고. 말하자면 태풍은 제풀에 지쳐 요란스럽게 울며불며 발버둥을 치다, 잠들어 버린 아이 같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녀석은 크게 화가 났고 팽이처럼 작은 모양으로 투정을 부리다, 스스로의 화를 주체할 수 없는 상태까지 번지고 말아,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두 잡아먹고야 말겠다는 괴물로 커버린 것이었다.


녀석에게도 태초의 순간은 존재했을 것이다. 보잘것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작은 상태에서 녀석의 분노는 서서히 성장했을 것이다. 그 의미 없는 시작, 분노, 아니 단순한 알림이 시작된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래,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고 싶어서, 아니 왜 돌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서, 조금 돌다가 말아버리면, 아무도 자신이 존재했던 그 순간, 역사를 기억해 주지 못할 테니까. 존재란 것은 때로 자신을 기만하고 위장하는 게 필요할 테니까.


나는 녀석이 지나가 버린 후, 아직 바람의 여운이 남은 창가 앞에 서서 녀석의 지난밤을 생각했다. 몹시도 분개했을지도 모를, 분노에 가득 차서 무엇이든 쓸어버리려던 녀석의 지난 시간들을 애써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녀석을 지우고 나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의 출발은 대체 어디쯤이었을까. 가려진 두 눈이 빛을 얻고 최초로 시간에 눈을 뜨던 시간, 세상을 처음으로 인식하던 순간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나는 왜 돌아갈 수도 없는 최초의 시간을 굳이 어럽게 회고하려던 걸까. 아마도 나는 보이지 않는 의미를 잡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존재하는 원인, 세상에 내가 태어난 원인, 이유 없는 불안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에 빠진 시간들의 원인들을 조목조목 하나씩 파헤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소비하는 시간의 양적인 부피만큼 계속 나는 과거로부터 멀어지고 단절되고 독립되고,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닌 더 이상한 세계 속으로 규합되고 있었으니, 나를 찾는 방법이란 점점 어려운 숙제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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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의미를 찾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어쩌면 태풍처럼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걸지도. 시간은 태풍처럼, 때로는 아주 작은 회오리처럼 내 주변을 감싼다. 나 역시 시간이 만든 원, 작거나 큰 반경 속에서 이미 돌고도는 존재다. 굳이 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직장과 집을 오가는 주체로서 비슷하지만 다른 원을 매일 그리는 중이니라는 뜻으로 나의 회전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그리는 원은 같아 보이지만 매일 다르다, 같은 세계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멀리서 그러니까 작은 팽이가 도는 걸 구경하며 시를 썼던 김수영처럼 나는 내 삶을 관조할 자격이 있으니, 같은 자리에서 변화 없이 돌뿐이라는 의미 없는 견해를 밀어낼 자격이 있는 셈이다.


나는 태풍처럼 매일 비슷한 자리를 돌더라도, 그 원이 때로는 타원으로 바뀌어 가거나 새로운 길을 찾아 여정을 그리는 더 큰 형상의 원이 될 것이라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가 과거에 돌던 시간들, 태풍처럼 이유도 없이 원을 그리며 소비하는 시간들조차, 의미 있건 그렇지 않건 모든 중심에, 안정하고 평화스러운 태풍의 눈에 나의 본질적인 의미가 있었을 테니, 분노에 찼던, 잊고 싶었던 시간들조차 모두 포용하는 것이 좋겠다.


잊고 싶거나 지워버리고 싶거나, 더러운 인연이라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애써 부인하려던 시간 속에 잠들어 버린, 나쁜 기억이던 사람들이건 그 모든 것들은 나를 만들었다. 내가 생긴 시점보다는 앞으로 그려나갈 새로운 원들이 더 소중한 의미로 찾아온다. 앞으로 더 얼마나 크게, 오랫동안 돌아야 할지 모르지만, 태풍처럼 시절을 쓸쓸하게 마감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세상이, 시간들이, 그리고 모든 우리가 의미가 없더라도 돌아야 한다면 돌면서 문제도 해결책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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