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갑질 더 이상 보기 싫습니다.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3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3

당신의 갑질 더 이상 보기 싫습니다.


퇴사 후, 그러니까 2019년 겨울, 대학교로부터 첫 번째 글쓰기 특강을 의뢰받았다. 그런데 희소식치고는 석연찮은 느낌이 따라왔다. “유튜브 보고 연락드렸어요”라고 담당자는 미팅 자리에서 친근하게 말했다. 유튜브? 구독자 40명에서 한 명이 사라진 ‘공대생의 심야서재’ 채널 말하는 건가?(지금은 실천남으로 바뀜) 이럴 줄 알았으면 1주 2영상 업로드 규칙을 충실하게 잘 지킬 걸. 그래도 열심히 살다 보니 빛을 보는구나, 싶기도.


연락을 받고 급히 미팅 일정을 잡았다. 작년에 출간한 책 한 권을 들고 경기도 서남쪽을 향했다. 집에서 정확히 2시간 반이 걸렸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산을 넘어가란다. 대학교를 찾아가는데 갑자기 등산이라니, 석연찮은 기분이 두 번째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담당자를 만났지만 계약은 마치 운명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건은 영상 제작 두 편과 오프라인 특강 1회.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백수에게 금액의 높고 낮음이 뭐 중요하랴. 일을 준다는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 삶이 이유 없이 지루해질 때마다 IT 사이드 프로젝트,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부업을 찾았더랬다. 개발자 사이트에서 간혹 구인공고가 등록될라치면 굶주린 하이에나들이(개발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는데, 난 그래도 그중에서 동작이 빠른 편이라 승리하는 축에 속했다. 난 그때의 기억처럼 이건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업체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만 가득하다. 온갖 밝고 깨끗한 단어들이 빗발치고 낙관적인 문장만 나열될 뿐이다. 하지만, 일이 진행될수록, 클라이언트의 기대치와 내가 추정한 일의 갭이 커질수록 분위기는 급속도로 식는 편이다. 사실 누구의 잘못인지 분명하지 않다. 돈만 바라보고 뛰어든 나든, 일을 주면서도 그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클라이언트든, 잘못은 양쪽에게 있으니까.


문제는 클라이언트의 저렴한 어휘 사용에서 발생하는 편이다. 말 한마디로 바로 전쟁이 발발한다.


그거 간단한 거 아닌가요? 그런 것도 돈 받고 개발하나요?
라이브러리 가지고 계시니까 금방 만드시지 않나요?
실력이 없어서 제때에 못 끝내시는 거 아닌가요?
제가 월요일 출근해서 확인할 수 있도록 마무리한 후 일요일 밤까지
웹하드에 올려주세요



대학교 측 담당자는 첫 미팅할 때, 마치 과거의 클라이언트처럼 내가 만든 유튜브 영상의 퀄리티 정도면 된다고 말했다. 음, 그 정도는 내가 만족하지 못할 것 같은데… 아무튼 영상 촬영을 마치고 파이널컷으로 편집을 시작했다. 1년 만에 편집을 하려니 작업이 더뎠다. 재미있는 것은 잊어버린 기억력이 스스로 복원됐다는 사실. 월요일에 편집을 시작해서 주말에야 겨우 편집이 끝났는데, 30분짜리 영상 두 편을 만드는 일이 어느새 9편 제작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럼에도 일정이 급하다는 담당자의 의견을 존중하며 나는 성실한 을이 되기로 했다. 영상을 몇 차례 전송하며 갑 담당자와 메일로 수정 사항을 주고받던 중에, 처음에 석연찮아했던 불안감이 현실로 돌아왔다.


자막이 중구난방이네요
혹시 보내주시기 전에 사전에 영상 끝까지 재생하여 문제없는지
확인 안 하고 주시나요?
기본적인 부분인데 기본도 안 지키시나 봅니다


이런 원색적이면서도 무례한 언어를 접해야 했다. 내 실력이 너프 된 기분이 들었다. (* 너프 : 칼질당하다, 성능이 나빠졌다는 뜻으로 쓰이는 온라인 게임 은어. 다른 말로는 하향이라고도 한다.)


일정이 급하다고 깍듯이 받들어 모시던 담당자도 역시 갑이었다. 그 역시 일감을 주던 과거의 다른 갑이 구사하던 무례한 언어를 사용했다.‘최종 영상을 월요일에 출근하여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일요일 자정까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협력이라는 말, 감사하다는 말로 문장이 종결됐지만, 그 문장에 숨은 일요일 밤까지라는 말. 동반자라는 말은 여지없이 뭉개어지고 마는구나,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이 세상엔 갑과 을의 관계뿐인데, 나는 언제나 슈퍼 울트라 을이구나.


나는 어떤 위치에서 살던 사람이었을까? 나는 늘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나도 누군가에게 갑의 위치에서 횡포를 휘두른 건 아니었을까. 언어라는 건 가벼우면서도 날아가 꽂히면 꽤 깊이 박힌다. 메일이나 카톡으로 주고받는 말이 꽤 가벼워 보여도 우린 그 말이 남긴 형편없음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니까.


나는 담당자에게 메일을 날렸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폭력 대화>에서 읽은 대로 갑의 언어를 관찰하고 그 언어에서 내가 느낀 감정, 그리고 내가 그에게 원하는 욕구를 정리했다. 먼저 담당자가 구사한 언어 중에서 내가 무례하다고 느낀 상황을 자세히 관찰했다. 다음으로 무례한 문장에서 내가 느낌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서운했으며 감정이 상했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아도 대화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서로 말을 조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폭력을 담은 말이 아니다. 물론 억지로 잘 했다고 칭찬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원하는 일정대로 일을 끝내길 바란다면 신중한 언어를 선택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부정적인 말, 상대방의 인격을 허무는 말,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말을 내뱉으면 결과물이 더 멋져지나. 나는 이런 문장을 접할 때마다, 그 담당자와의 인연을 당장 끊고 싶을 정도였다. 설사, 그 대학교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인격을 비굴하게 낮추면서까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어쨌든 갑의 입장에서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던 담당자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채팅창에서만큼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사과의 메일은 엉뚱한 말단 직원으로부터 도착했다. 잘못은 저지른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죄 없는 직원이 잘못을 뒤집어쓰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나 역시 어쩌면 과거에 갑의 횡포를 약한 사람에게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나도 한 번쯤은 어디선가 갑의 위치에 있었을 테니. 그때 내가 사용한 언어는 얼마나 저렴했을지,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웠다.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도 먹고살기 위해 참기만 했을 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사람은 입장이 바뀌면 상대방의 처지를 바라볼 수 있다.


권력이란 건 그것을 쥐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는데, 난 을의 입장을 체험했으니 갑이 된다면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갑의 횡포를 절대 부리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도 함께 해서 더러워질 인연이라면 처음부터 맺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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