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말로 지독한 완벽주의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 앞 길을 방해하는 세력은 부족한 재능도 얕은 지식도 강력한 경쟁자도 아니다. 오직 무엇이든 완벽하게 끝장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일말의 가능성마저 폭락시킬 뿐이다.
아주 오래전, 스승은 내게 이런 충고를 내민 적이 있었다. "결과물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일단 시작을 하면 끝내는 게 중요해. 짧은 시간에 완성하고 부족한 부분을 차차 보완하면 돼."라고. 하지만 나는 그때 완성되지 못한 모듈 하나를 놓고 며칠째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해외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그들의 충고에 따라 알고리즘을 적용해보고 심지어는 너무 생각에 빠진 나머지, 잠을 자다 꿈에서 신에게 계시를 받은 날까지 있었다. 그런 날은 신이 내린 비장의 해결책을 잊지 않기 위해, "잊지 말자, 잊지 말아야 돼, 꼭 기억하자"라고 주문을 외우고, 출근하자마자 책상 앞으로 달려가 코딩을 시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이 말은 과거 개발자로 죽도록 야근하던 시절에도, 글을 쓰는 작가로 사는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과거엔 코드에 그랬지만 지금은 문장에 그런 편이다. 글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문단의 구조, 주제 의식, 촘촘한 연결, 독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큰 흐름을 잃어버리고 아주 작은 문장에 심각할 정도로 집착하게 된다. 문제는 그런 현상을 몰입으로 미화시키는 경향 때문에 더 심각한 결과 - 납품 지연, 퀄리티 저하 - 를 초래하기도 한다. 물론 몰입 자체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몰입할 대상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문제다. 나무에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숲을 보지 못하는 현상은 코딩이나 글을 쓰는 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무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태도는 고정된 습관 때문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그렇게 일하는 것에 길들여졌으므로, 그 방식대로 일을 해도 문제가 없었으며 그 태도에 대하여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으므로 계속 기존의 방식대로 고집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의 피드백을 받은 이후로, 나는 스스로의 태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됐고 교정할 계기도 갖게 됐다.
한 가지 작업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면, 애초에 그리려던 큰 윤곽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보잘것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림을 그려도 처음엔 구도를 잡고 윤곽선부터 그리지 않나? 정밀한 작업들은 점진적으로 진행해도 절대 늦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체계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럴 때는 의식적으로 큰 그림부터 그리도록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시스템이란 별게 아니다. 종이에 연필로 내가 써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결정하고 밑그림부터 그린다. 그리고 주제와 연관된 세부 주제를 찾고,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지 구조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아날로그보다 디지털이 편하다면 마인드맵이나 노션도 추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수단으로 큰 그림을 그리는지의 여부다."종이로 그릴까요? 마인드맵으로 그릴까요?"라고 질문하는 것은 숲을 보지 않고 나무를 보는 현상과 똑같다. 수단 보다 방법, 어떤 태도로 일을 바라보는 것인지, 관점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넓은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높은 산봉우리 위에서 기류의 흐름을 한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시각은 시스템적인 사고 없이는 절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작은 부분을 재빠르게 완성하고 레고 부품 끼워 맞추듯이 전체를 조립하고 부족한 부분을 다시 반복하며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마인드맵이나 노션과 같은 툴은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 큰 그림을 그리고 흐름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해 준다. 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려는 완벽주의는 선이 아니다. <아티스트 웨이>에서 줄리아 카메론이 말했듯, 완벽주의는 최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최악을 추궁하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만족도의 수준을 모르니 스스로를 다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다 결국 마감을 놓치고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 채 날밤을 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완벽주의에 관한 이 이론은 글을 쓰는 작가든, 코드를 짜는 개발자든,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가든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내 스승은 내가 완벽주의에 빠져 단 하나의 모듈조차 완성하지 못할 때마다, 나에게 단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한 바퀴부터 돌아라" 이 말엔 여러 가지 뜻이 담겼다. 한 가지 모듈에 집착하지 말고, 톱니바퀴가 모여 완성된 수레를 연상하며, 때로는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바깥에서 산책이라도 다녀오라고, 그러니까 동네 한 바퀴라도 돌고 오라는 뜻이 담겨 있기도 했다. 어떤 작업이든 우리는 그 일에서 한 발짝만 물러서도 윤곽을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한 가지 일에 집착했는지 자신의 등을 비로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완성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제 큰 가지에서 작은 가지들을 하나씩 붙여 나가면 어떨까. 집착에서 벗어나면 마음도 편해지고 내가 만들려 생각했던 결과물의 모양을 계속 상상해나가며 완성할 길도 열린다. 당신도 나처럼 완벽주의에 빠져 있었다면, 이제 그 관성적 사고, 함께 해서 더러웠던 완벽주의 성향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