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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Dec 31. 2023

닿아있는 너와 나의 시간

늙어간다, 우리 모두 

사람의 1년은 개나 고양이에겐 수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노령의 반려동물에겐 더더욱 짧지 않은 시간이다. 


2023, 연초


1년 전과 지금의 보리를 비교해 보면, 불과 1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위장기능이 약해져 구토를 자주 하게 되었고, 사료를 점점 먹지 않더니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간식과 섞어주어야만 겨우 먹게 되었고, 좋아하는 간식도 금방금방 싫증을 내고, 5~7일에 한 번 꼴로 식욕촉진제를 먹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위장관영양제 바쏘드를 매일 먹이기 시작했다.  

가장 건강했을 때보다 체중이 확 줄었고, 가을을 기점으로 14살이 되었고, 창밖의 풍경이나 장난감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줄었고, 자는 시간이 늘었다. 

캣타워에 별로 올라가지 않고, 우다다도 어쩌다 한 번씩 할 뿐이고, 사냥놀이 후 전리품을 밥그릇에 보관하는 행동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털의 윤기가 예전만 못해졌고, 털도 많이 빠지고, 눈곱이 자주 낀다. 



2023, 봄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귀엽고, 귀엽고, 귀여운 것. 그리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것. 

어리광 가득 묻은 가느다란 목소리와, 한쪽 눈이 찌그러지는 평생토록 어설픈 눈 뽀뽀,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골골송.  


2023, 여름


중년의 한 인간은, 노년의 한 고양이와 함께, 하루하루 늙어만 가는 시간의 한 자락을 공유한다.  

나의 시간이 너의 시간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고, 너의 마지막 이후의 시간들을 내 마지막 날까지 감내해야 함을 안다. 

알면서도 마치 잊은 듯, 마치 젊은 한 동물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한 동물을 아끼듯, 늙음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현재가 영원인 듯, 오늘도 그저 아무 일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하루를 살아낸다. 

먹먹하나 담담하게, 사랑만 가득한 채. 


2023, 연말


다시 네 계절이 순환하게 될 것이다. 동물에게 수년에 해당할 한 해 동안, 내 고양이의 시간은 더더욱 내가 닿을 수 없는 속도로 빨라질 것이다.   

그러니 부디 오늘도 아무 일 없기를, 있어도 큰일이 아니기를, 큰일이어도 그저 순하게 지나가기를, 속는 줄 알면서도 또다시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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