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시에이션을 하고 싶습니다. 구루님.
경수는 은총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구루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니시에이션에 참여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경수가 재차 말해도 구루는 묵묵부답이었다.
제가 신진리교에 진심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자네는 이미 증명하고 있어. 계속 음악을 만들고 있지 않나.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합니다.
경수야.
네. 구루님.
너의 의지가 아니지 않느냐.
네?
너의 의지가 아니면 할 수 없다.
제 의지가 맞습니다.
다른 신도들의 시선 때문 아니냐!
구루가 경수에게 호통을 쳤다. 경수는 구루의 이러한 반응을 예측하지 못했다. 자신이 수행의 시작이라고 하는 이니시에이션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구루의 대답은 경수의 예측과 달랐다. 구루는 마치 경수가 아직 신진리교의 모든 것을 믿지 않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구루님.
구루는 경수의 말에 코웃음 쳤다. 남자도 슬그머니 나타나 구루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니시에이션이란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사람들이 행하는 수행의 전 단계를 의미했다. 24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구루가 직접 만드는 칵테일을 마시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탐험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뒤틀렸는지를 확인했다. 이후 수행에 들어가서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신진리교의 일반적인 수행 과정이었다.
이니시에이션을 받으면 수행에 들어가겠느냐?
경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행의 과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이니시에이션을 할 수 없다.
구루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찰나, 경수는 말했다.
작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구루가 걸음을 멈췄다.
제 내면세계가 너무나 오염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발 저를 정화할 기회를 주십시오.
구루는 한참 동안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자신을 바라보는 구루의 눈을 최대한 또렷하게 구루의 눈을 보려고 노력했다. 구루의 눈은 반타 블랙이었다. 경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경수는 절박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경수는 끝까지 구루의 눈을 응시했다.
알겠다.
경수는 신진리교를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진리교에서 머무는 이유는 그나마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경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기자들은 매일 경수를 찾아왔고, 유튜버들은 경수의 집 앞에서 경수를 기다리다가 말을 걸곤 했다. 경수가 보이기만 하면 유튜브 인기 급상승 영상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경수에게 자극적인 말을 원했다.
혹시 지금 심경이 어떤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란 경수 씨에게 어떤 존재이신가요?
아버지와 사이가 좋으셨나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직도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혹시 네가 죽인 거 아니야?
경수가 집에 갈 때마다 기자들과 렉카 유튜버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경수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새벽이나 늦은 밤에 집 밖을 나가려고 해도 집 앞에서 진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더현대 팝업스토어를 새벽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경수를 원했다. 경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점점 힘들어졌다. 장례식장에서 잠깐 인사를 나눈 하연에게 전화를 받고, 경수는 바로 신진리교 마을에서 지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듣자마자 경수는 승낙했다. 연희동 집을 바로 팔았고, 비상금을 제외한 모든 돈을 신진리교에 기부했다. 경수는 수행의 과정에 임하지 않았지만, 신진리교 마을에서 하연과 함께 가장 좋은 방에 지낼 수 있었다. 매달 있는 집중 기도 시간은 신진리교에 있는 시간 중 가장 고통스러웠는데, 그 시간도 집에 있을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새 발의 피였다.
고등학생인 경수가 이니시에이션을 하고 싶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경수에게 이니시에이션은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강조했던 하나님이 몸소 신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도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신도들도 경수가 질문해 보면 대부분 꿈에서 보거나, 자신이 보았다고 상상하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진리교에서 이니시에이션만 하면 자신의 어두운 면이 바로 보인다는 것이 너무 명쾌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종교에서는 전혀 정립되어 있지 않은 절차가 신진리교에서는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었다. 점점 이니시에이션이 궁금했다. 이니시에이션으로 수행의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신도들의 말을 계속 듣다 보니 과연 자신도 수행의 필요성을 알 수 있을까 궁금했다.
더불어 신진리교 내부에서 점점 경수를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찬송가 작곡을 하면서 경수에 대한 의심이 일순간 풀어졌지만, 이내 수행도 하지 않은 자가 계속 이렇게 중요한 업무를 맡아도 되는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신도들 사이에서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남자가 나타나서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경수를 놀렸다.
남자는 경수가 작곡에 집중할 때도 큰 방해 요소였다. 처음에 경수가 작곡에 전념할 때면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작곡을 진행하다가 조금 집중력이 흐려질 때는 가까스로 나타나서 경수를 방해했다. 구토하는 때도 많아야 하루에 한두 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작곡을 할 때마다 항상 경수 옆에 앉았다. 경수가 멜로디를 만들 때, 경수와 다른 음의 건반을 짚으면서 경수의 선택에 의문을 표했다. 경수가 반주를 연습할 때도 옆에 앉아 경수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몇 번씩 계속 구토가 나왔다.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고 작곡을 해도 계속해서 몸속 안에 무언가가 올라왔다. 작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마치 웹툰 작가가 한없이 마감이 밀리는 것처럼, 경수도 계속해서 작곡 마감 기한을 맞추지 못했다.
남자의 지속적인 방해는 결국 전체 예배 중 실수로 이어졌다. 찬송가를 부르기 위한 반주를 할 때였다. 여느 때처럼 실수 없이 연주하던 경수는 옆에 남자가 앉을 것을 보자마자 구토가 올라왔다. 남자가 처음 등장한 것도 아니었다. 매번 전체 예배 때 경수가 연습할 때마다 남자는 경수를 방해했다. 가장 잘 보이는 관객으로 있기도, 예배를 진행하는 책임수행자에 빙의하기도, 피아노 앞에서 갑자기 얼굴이 솟아나기도 헸다. 경수는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엔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체로 등장하던 것과 달리 남자는 구루의 옷과 구루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작정하고 자신을 신진리교에서 끌어내리고자 하는 것 같았다. 연주가 갑자기 중단되자 신도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책임수행자가 경수에게 급하게 달려왔다. 예배는 신성한 순간이고 예배당은 신성한 공간이었기에 구역질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아픈 티조차 내면 안 되었다. 경수는 단순한 실수인 척 얼버무리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는 불안했다. 피아노에 문외한인 사람이 들어도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마치 조금만 잘못하면 바로 불협화음이 나올 것 같아 마음을 졸이고 들어야 하는 연주였다. 찬송 시간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끝났고, 신도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아직 마음이 정화가 안 되었으니 그런 거지. 악이 아직 차 있나 봐. 남자는 입 모양으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경수 옆에 앉아 따라 했다.
경수는 이니시에이션을 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조금 나아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반타 블랙으로 모든 면이 칠해진 아주 작은 방에 들어간다. 들어온 문 쪽을 바라보고 앉는다.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옛날 아파트에 있는 우유 투입구와 모양은 같지만, 훨씬 작은 투입구로 음료가 담긴 유리컵이 들어온다. 그때는 그 작은 틈으로 빛이 들어와서 음료가 살짝 보인다. 음료가 놓인 곳을 찾는다. 컵을 잡는다. 음료를 마신다.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이니시에이션은 사흘 동안 진행된다. 음료는 하루에 두 번 받는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시간과 공간을 지각할 수 없다. 반타 블랙으로 뒤덮인 방에서 내가 어느 시간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모두 사라진다.
음료를 마시고 검은 벽을 계속 응시하고 있으면 앞에 무언가가 나타난다. ‘무언가’는 계속해서 형태가 변한다. 하얀색 솜뭉치였다가, 무지개 같은 형형색색의 스펙트럼으로 변하기도 한다. 스펙트럼에서 얼룩덜룩한 공룡알로 변하기도 한다. 무언가는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면서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무언가가 내 눈 바로 앞까지 다가오면, 그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 혹은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 갑자기 반타 블랙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소나무가 울창한 어두운 숲의 세계였다가, 고층 빌딩에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도시의 세계였다가. 노란색 꽃을 보면서 기뻐하는 커플이 가득한 유채꽃밭의 세계로 가기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끝이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에 있는 나룻배에 앉아 있다. 뱃사공은 등을 진 채 묵묵히 노를 젓는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육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점차 나아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까지 망망대해에 계속 있는 건가, 하는 마음이 피어날 즈음, 뱃사공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본다. 뱃사공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순간, 나는 반타 블랙의 세계로 돌아온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린다. 귀를 찌를 듯이 날카로운 비명부터 고통을 참는 듯한 저음의 신음이 섞여 화음을 만들고, 사람들의 외침이 멜로디가 된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악마야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감히 악마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다니 이 불경한 것
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더욱더 이 소리에 집중한다. 이것이 내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디서 도망치려 그래
받아들여
너를 받아들여
너는 괴물이야.
나는 사람들의 외침을 참다못해 눈을 뜬다. 눈을 뜨면 반타 블랙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벽지에는 남자의 얼굴이 바둑판 배열로 가득 차 있다. 바둑판에 있는 남자의 얼굴마다 남자는 각자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한 남자는 웃고 있고, 다른 남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른 남자는 얼음처럼 냉혹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고, 다른 남자는 이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남자들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고통스럽다.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때 남자들이 가득한 벽 앞에 구루가 나타난다.
참아라.
나는 나가고 싶다.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짓누른다. 나는 다시 앉을 수밖에 없다.
참아라!
못하겠습니다.
순간 각목이 나의 몸을 내리치는 듯한 고통이 찾아온다. 비명을 지르자 고통은 더 커지고 잦아진다. 말을 멈추고 조용히 있어야만 한다.
참아라!
내 신음이 점점 작아지면서 찾아오는 고통이 멈춘다. 나는 애처로운 눈으로 구루를 바라본다. 구루는 내게 직접 음료가 담긴 컵을 받는다.
마셔라
나는 컵을 받아서 들고 망설인다. 또 이러한 세계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
마지막 관문이다.
나는 음료를 단번에 들이켰다. 이내 정신이 끊어졌다.
경수가 일어난 곳은 경수가 지내는 방 침대였다.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이니 욱신거렸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자신이 기억이 끊어지기 전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다른 세계가 아닌 이 시점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장 욱신거리는 건 성기 쪽이었다. 경수의 속옷에는 피와 알 수 없는 액체가 묻어 나왔다. 경수는 이니시에이션 때 구루에게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루와 남자가 다를 것이라 생각한 경수의 실낱같은 희망은 낱낱이 부서졌다. 구루도 결국 그 남자와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경수의 희망이 무너지자마자 나타났다. 경수의 멍을 보고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성기는 발기되어 있었다. 짐짓 걱정하는 척했지만, 그 남자는 흥분한 상태였다. 역겨움이 차올랐다. 그때, 구루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방에 들어왔다. 경수는 얼른 속옷과 바지를 입고 구루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무엇을 보았느냐.
구루가 물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경수가 답했다.
정확히 어떤 것을 보지 못했느냐.
경수는 자신이 반타 블랙의 방에 흡수당한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울창한 숲과 망망대해의 바다, 그리고 그 남자로 가득 차 있는 방의 이야기까지 이어갔다. 구루는 경수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진지하게 경수의 말을 경청했다. 경수는 구루의 등장 전까지 자신이 체험한 세계에 대해 빠짐없이 말했다. 그러고는 말을 멈추었다.
계속 말해라.
경수는 구루의 등장 이후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갔다. 구루가 등장해 마지막 음료 잔을 건넸다. 감히 마시지 못하겠다고 말했지만, 구루님의 배려로 마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갑자기 방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 방의 검은색과 완전히 대척되는 하얀 방의 세계가 나타났습니다. 그 공간에는 저와 구루님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루님께서 제게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황홀경이 펼쳐졌습니다. 그 황홀경의 시간에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제가 있는 이 방의 침대였습니다.
경수는 역겨움을 참으며 기억나지 않는 그 순간을 구루의 입맛에 맞춰 창작해서 말했다. 구루는 경수의 거짓말에 만족한 듯한 표정이 살짝 스쳤다. 경수가 구루를 집중해서 보지 않았으면 눈치도 못 챘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남자도 구루 옆에 서서 황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성기는 점점 더 높게 솟아올랐다.
곧 수행에 들어가거라.
감사합니다.
그전에,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지연이라는 아이를 맡도록 해.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지금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야. 일단 친해지도록 해.
왜 제가 맡아야 합니까.
해야 할 일이 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곧 말해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구루는 말을 멈춘 채 경수의 표정을 몇 분간 살피다 이내 방을 나갔다. 경수는 이제는 신진리교를, 구루를 믿을 수 없었다. 신진리교의 모든 말이 아버지의 말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게 구루의 행동을 위한 합리화였다. 경수에게 더는 신진리교의 세계를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구루가 나가도 남자는 여전히 경수의 앞에서 자신의 한껏 발기된 성기를 보였다. 경수는 죽음으로 신진리교의 세계를 떠나고 싶었다. 이니시에이션이 끝나고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남자는 더 자주 나타날 것이다. 애써 아니라고 생각했던 구루의 추한 진면목도 마주했다. 앞으로 더 자주 마주할지도 모른다. 경수에겐 신진리교 바깥세상에도, 신진리교 안 세상에서도 더는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경수는 지연을 만나고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생의 의지가 다시 불탔다. 이 아이만큼은 내가 겪은 세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기를 바랐다. 경수는 지연을 보면 볼수록 자기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지연은 무한한 스펙트럼의 빛을 가진 아이였다. 이 아이만큼은 자신의 빛이 반타 블랙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랐다.
경수는 성인이 되자마자 신진리교 마을을 떠나겠다고 구루에게 말했다. 구루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경수의 말을 승낙했다. 경수가 이니시에이션을 받은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만약 이니시에이션을 받지 않았다면 허락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처음에 경수는 지연과 함께 신진리교의 마을을 뜨고자 했다. 구루에게 지연과 가까워지려면 자신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구루가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가능했지만, 지연만큼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구루도 지연의 다른 신도와 다른 비범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수는 어쩔 수 없이 신진리교 밖에서 지내면서 매주 이틀씩 신진리교 마을에 돌아와서 지연을 돌봤다.
경수는 신진리교 밖에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연이 진행하는 드라마의 온라인 콘텐츠 담당 AD로 일하기 시작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경수는 정연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아도 정연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구현했다. 첫 작업은 메이킹 영상 제작이었다. 당시 메이킹 영상을 담당하는 제작사에 식중독이 퍼져 모든 인원이 쓰러졌다. 릴리즈가 임박할 때까지 편집을 전혀 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연은 어쩔 수 없이 경수에게 편집을 맡겼다. 경수는 파일을 받아서 이틀 만에 1회부터 6회까지 총 3 주간 릴리즈될 메이킹 영상 편집을 끝냈다. 정연은 촬영이 밀려서 메이킹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일단 편집을 맡기고 결과물이 나오면 세세하게 피드백을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피드백을 줄 사항이 전혀 없었다. 경수의 편집 템포는 완벽했다. 영상마다 즐겁고 웃긴 장면들과 힘든 촬영을 완수한 데서 오는 감동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있었다. 경수에겐 아무리 많은 영상을 공부하고 편집해도 갖기 힘든 영상에 대한 감이 있었다. 정연은 편집본을 확인할 때마다 경수에게 전화를 걸어 경수의 영상을 칭찬했다.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편집은 어디서 배웠어요?
따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진짜로?
네.
좋은데요.
정연은 경수에게 예고편 편집과 하이라이트 영상 제작 등 더 많은 일을 맡겼다. 경수는 계속해서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 예고편에서 어느 정도까지 정보를 노출해야 사람들이 다음 회차를 궁금해할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상황을 어떻게 음악과 컷 조합으로 긴장감 있게 연출할 기교도 있었다. 정연이 그 장면을 실제로 갈등 장면으로 순간 착각할 정도였다. 정연이 재미가 없어 예고를 만들기 어렵다고 예측했던 회차의 예고편도 경수의 예고만 보면 너무 기대될 정도였다. 하이라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경수는 영상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하이라이트를 만들었다. 10분의 하이라이트만 보면 1회부터 4회까지의 드라마 내용이 너무나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정연은 경수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고 5회 차를 보기 전에 1회부터 4회까지 볼 필요가 없겠다고 느꼈다. 이후 정연은 없는 시간을 내서 경수와 점심 식사 약속을 잡았다. 밥이 목적이 아닌, 경수를 실제로 보고 누군지 보고 싶었다. 경수는 고민 끝에 승낙했다. 경수는 검은 모자와 마스크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고급 한우집이었다. 정연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검은 옷에 놀랐지만, 이내 적응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맛있는 고기가 눈앞에 보여도 경수는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경수 씨. 좀 드세요.
아, 괜찮습니다.
그럼 저도 못 먹어요. 이거 비싸요.
정연은 처음에 경수에게 얼굴에 큰 상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연은 넌지시 자신은 전혀 상대방의 외모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면서 경수가 마스크를 벗도록 응원했다. 경수는 고민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을 때 자신이 죽은 유명 목사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챌까 무서웠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난 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마스크를 벗었다. 정연은 경수의 흠잡을 곳 없는 외모와 그 외모에서 느껴지는 묘한 아우라에 압도되었다. 정연은 자신이 압도되었다는 걸 숨기고자 태연하게 고기를 먹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경수를 고기를 한두 점 먹고 더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경수는 오랫동안 채식을 해서 갑자기 고기를 먹으니 속이 놀란 것 같다고 답했다. 정연이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묻자 경수는 그래도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그 침묵을 깬 건 정연이었다.
경수 씨,
네.
말 놔도 될까요?
그럼요, 피디님.
그럼, 말 편하게 할게. 경수야, 너 어떻게 이렇게 잘하는 거야?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한 게 아니야. 진짜 궁금해서 그래.
제가 있던 세계에서 했던 일과 비슷해서 이미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원래 영상 일을 했었어?
아닙니다.
그러면?
작곡을 했습니다.
음악?
네.
음악하고 영상 하고 비슷한가?
같습니다.
같아?
네.
어떤 점이?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면 배신할수록 역설적으로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음 다음에는 통상적으로 이 음이 오겠지,라고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삼도 화음, 칠도 화음 이런 식으로요. 정해진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3도 화음을 따르는 척하면서 중간에 3도 화음이 아닌 음을 하나씩 섞으면 사람들은 더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세계에 예상하지 못한 세계가 들어온다고 할까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번에는 어떤 세계가 올지 궁금해하면서 듣게 되고, 집중하게 됩니다. 영상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통상 키스신을 기대하는 상황에 둘이 헤어지는 장면을 넣으면 키스신을 안달이 나면서 기대하게 된달까요.
그렇지. 그게 편집이지.
정연은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고 경수의 말에 집중했다. 편집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거의 그대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정연은 드라마를 프로듀싱하면서 항상 답답했다. 선배들은 편집의 리듬이 전혀 맞지 않는데도, 음악으로 분위기를 끌고 가면 괜찮아 보인다는 책임 없는 기계적인 말을 앵무새처럼 하곤 했다. 별로인 컷을 어떻게 쓰지 않고 편집을 이어갈까에 대한 고민 없이 몰입감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음악에만 맡겨 놓았다. 후배들은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정도로 편집의 감이 있지 않았다. 모든 정보가 다 담겨있어 늘어지거나, 너무 생략해서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 해 놓고 긴박감이 있다고 항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경수는 전혀 달랐다. 어떻게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때로는 배반하는 편집을 해야 하는 지까지 음악을 예시로 정확하게 말했다. 육 년간의 피디 생활 중 처음이었다.
정연은 경수에게 HBC 입사를 제안했다. 경수는 거절했다. 정연은 재차 제안했다.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과 일하고 싶었다. 정연의 반복되는 구애에 경수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지연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연도 불확실성에 놓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길어졌다. 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조금 다르게 제안했다.
그럼 내 밑으로 들어오면 되겠네.
피디님 밑으로요?
응. 내가 최근에 제작사를 하나 만들었거든.
아….
걱정하지 마. 네 정보는 노출되지 않도록 할게. 내가 대표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사실 대표라기도 뭐 하지, 아직 소속 직원이 나 한 명뿐이니. 너랑 나랑 둘이서만 일하는 거야.
경수가 고민하자 정연은 말을 덧붙였다.
네가 나랑 일하는 동안에는 다른 직원도 채용 안 할게. 걱정하지 마.
네 알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재미있는 거 많이 해보자.
경수는 정연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비대면으로 일하는 방식은 동일했다. 다만 더 많은 드라마의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을 뿐이었다. 단순 예고편 및 하이라이트 편집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대본을 어떤 장르로 프로듀싱하고 홍보해야 할지 논의했고, 포스터 및 음악 콘셉트 회의에도 참여했다. 정연의 배려로 모든 과정을 비대면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점차 둘은 딱 맞는 콤비가 되기 시작했다. 경수가 정연과 일 한지 딱 이 년이 되던 해에, 경수는 구루에게 명령을 받았다. 지연에 대한 영화를 찍으라는 명령이었다. 영화를 찍은 후에는 바로 수행에 들어가라는 명령도 뒤따랐다. 경수는 구루가 자신을 신진리교 마을 밖으로 보낸 걸 허락한 게 이 모든 것을 위한 밑그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