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은 경수가 입원해 있다는 말을 영근에게 듣자마자 용인에 있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바로 돌아왔다. 정연이 피디가 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연에게는 언제나 사람보다 일이 먼저였다. 자신의 부모님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아도 항상 일이 끝나고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아도, 회의를 모두 끝내고 보고까지 마친 이후에 병원으로 향했다. 정연이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어머니가 수술을 끝내고 입원실에서 회복 중이었다. 아버지는 의지할 곳 없이 어머니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린 셈이었다. 정연이 입원실에 들어오자 아버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년이라고 말하며 눈을 흘기고 병실에서 나갔다. 그런 정연은 경수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촬영장에서 나와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정연은 범칙금을 낼 것을 각오하고 버스 전용차선으로 운전해서 한달음에 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를 마친 뒤 경수는 입원실에 잠들어 있었다. 영근에게 경수가 방금 다시 잠들었다는 말을 들은 정연은 영근에게 잠시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영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정연과 경수 단둘이 있는 순간이었다.
경수야. 넌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니.
정연은 경수의 손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경수는 정연의 말에 잠에서 깨서 정연을 바라보았다. 정연은 경수가 눈을 뜬 것을 본 정연은 아무 말 없이 경수를 바라보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서로에 대해서 생각했다.
경수는 정연에게 영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왜 자신이 기절했는지와 그 남자가 영근이 되어 말할 때 쓰러졌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복음교회에서 아버지에게 가장 촉망받은, 아버지가 후계자로 점찍어놓은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가장 큰 목적은 복음교회의 재건일 거라는 것까지 빠짐없이 말했다. 정연은 경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마음이 변했다. 자신이 경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에게 경수의 정보를 털어놨다는 것이 미안했고, 그 미안한 감정은 영근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정연은 평정심을 되찾고 차분하게 말했다.
죽여버릴까?
아니에요. 언니.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내가 알려준 네 정보를?
네.
그럼 나를 왜 찾은 거야?
명분이 필요했겠죠.
어떤 명분?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명분이겠죠.
야, 명분이 뭐가 중요해. 내가 가서 말할게. 좆 까라고.
아니에요, 언니. 어차피 그 사람은 이번 기회를 못 살리더라도 다른 기회를 잡아서 접근할 거예요. 그 사람이 쓴 단독기사가 몇 개인데요. 이번에 접근에 성공했으니, 다음에 접근하는 건 훨씬 쉽겠죠. 저를 추적할만한 장치를 설치할 테니.
녹음기 같은 거? 그런 거면 내가 지금 아는 팀 불러서 여기 전부 의뢰할게.
아니에요. 언니, 제가 무슨 말하는지 아시잖아요.
하….
못 말려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되레 이용해야죠.
어떻게?
영근 씨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요.
저 남자가 원하는 게 뭔데?
제가 탈출해서 복음교회에 돌아오는 거겠죠.
복음교회에?
네.
그건 절대 안 돼.
괜찮아요.
영근 저 사람도 그….
경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경수를 정연이 자신을 위해서 최대한 말을 고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경수가 정연의 말을 받았다.
저 사람은 몰라요. 제 눈에 보이는 그 남자의 정체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언니, 그 당시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 언니밖에 없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복음교회가 폐업하면서 얼마나 많은 언론 기사가 나왔어? 온갖 비리에 폭행에…. 그 비슷한 일들도 있었잖아. 네가 신진리교에 들어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 나름 그럴듯하게 추측한 기사도 나오지 않았어?
정확한 증거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직접 말한 의견은 담지 않은 상황 해석이었으니까요.
내 주변 사람들은 너 관련 기사 보자마자…. 하. 아니다.
영근 씨는, 이 남자랑 같은 반타 블랙 색깔의 사람이에요.
아….
네. 그래서 더 인정하기 싫을 거예요.
하. 복잡하네. 그래서 어떻게 이용하게?
지연이가 탈출할 가장 안전한 곳을 영근 씨가 제공할 수 있어요.
뭐?
그때였다. 정연을 위해 자리를 비켰던 영근이 헉헉거리며 입원실로 뛰어 들어왔다.
경수야, 정연씨.
무슨 일이세요?
경수가 말했다. 정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근을 째려봤다.
신진리교 사람들이 왔습니다.
구루가 직접 경수를 찾는 건 경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정연과 영근, 그리고 구루가 서로 대면하게 되는 날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다. 하나 더 예상치 못한 건 구루가 지연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지연은 불안에 가득 찬 표정으로 구루 옆에 서 있었다. 그 뒤로 하연을 비롯한 책임수행자 여러 명이 보였다. 구루가 책임수행자들을 향해 눈짓하자 책임수행자들은 입원실 밖으로 나가 문을 지켰다. 구루는 젠틀하게 경수 옆에 있는 정연과 영근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연과 영근은 구루에 인사하면서도 지연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아이구나. 지연이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정연과 영근은 저 아이가 지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구루는 이내 경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경수는 구루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몸은 괜찮은가?
네. 오늘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혹시 경수 감시하는 거예요?
정연이 구루가 말하려는 찰나를 파고들고 질문했다.
저희는 다른 종교와 달리 형제·자매님들을 감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경수가 여기 있는지 알았어요?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안 그러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것에요.
영근은 다른 종교라는 표현이 자신의 복음교회를 겨냥한 것이라는 걸 알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정연이 먼저 나서 주어서 이내 말을 삼켰다.
신고할 거면 신고하십시오.
구루의 말에 정연은 핸드폰을 꺼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여기 제 후배 스토킹하는 미친놈이 입원한 병실까지 찾아왔어요. 빨리 내쫓아주세요.
경찰이 오고 한동안 크고 작은 소란이 이어졌다. 문 앞을 지키는 책임수행자들과 경찰 사이 몸싸움이 오갔다. 경찰은 책임수행자들을 제압하고 입원실에 들어오면서 바로 체포하고자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이내 특히 스토킹 하는 사람이 신진리교의 교주라는 것을 알게 된 경찰은 긴장한 표정으로 바로 태도가 바뀌었다. 신진리교는 특히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는 신흥 종교였다. 아직 어디에서도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았고, 특히 최근에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컬트적인 인기까지 끌고 있었다. 정치에서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특히 최근에 당선된 대통령에게 선거 때 거액의 후원금을 기부했다는 사실과 전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을 제작한 연예기획사의 뒷배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도 행사하기 시작했다. 미온적인 경찰에 정연은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왜 경찰서로 데려가서 조사하지 않는지 캐물었다. 경찰은 못 이기는 척 경수에게 질문했다.
경수 씨, 이분이 경수 씨 스토킹하는 거 맞습니까?
아니, 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말할 수 있겠어요?
경찰은 정연을 무시하고 재차 물었다.
스토킹 하시는 거 맞아요? 증거 있으세요?
경찰에게 제발 증거가 없기를 바라고,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경수는 경찰이 원하는 방향으로 경찰에 질문에 답했다.
아니에요.
경찰은 경수의 말에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경찰은 정연에게 자존심을 세우는 말을 끝끝내 꺼내며 자리를 떴다. 정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이 나가자 구루는 예의 있지만, 강단 있는 말투로 정연과 영근에게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둘은 구루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 하는 건가.
구루가 경수를 꾸짖는 와중 지연이 경수에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밖에서 저런 불경한 자들과 어울리는 건가?
아닙니다. 그저 제가 일하는 회사의 상급자입니다.
저 남자는 복음교회 사람이지 않나!
저 남자가 오늘 갑자기 저를 찾았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제 근처로 오지 못 하게 하겠습니다.
흠….
구루가 흥분을 다스리는 사이 지연이 경수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지연은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 괜찮아?
응.
내가 구루 님께 말씀드렸어.
뭘?
언니가 쓰러진 것 같다고.
응. 오늘 벽장에서 언니가 병원에 쓰러져 있는 세계에 가게 돼서. 너무 무서웠어. 아, 그리고 언니, 저기에 있는
고마워 지연아.
경수가 재빨리 지연의 말을 막고 지연의 눈을 응시했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는 단호한 눈짓이었다. 여기서 지연의 세계가 구루에게 들통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지연도 경수가 평소에 자신에게 하는 말투가 아닌 것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말을 멈췄다. 둘의 은밀한 소통을 구루에게 감추기 위해 경수는 재빨리 말을 꺼냈다.
지연아, 언니가 쓰러져 있던 게 보인 거야?
응. 눈앞에 언니가 링거 하고 저 심박수 기계를 단 채 쓰러져 있었어.
구루님께 말씀 전해줘서 고마워.
구루는 지연과 경수의 대화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많이 친해졌구먼.
네. 구루님 덕분에 너무 좋은 친구가 생겼습니다.
저도 언니가 너무 좋아요.
지연이 경수의 말을 듣고 해맑게 구루에게 말했다. 구루는 지연에게 미소를 지었다.
영화는 언제쯤 완성되나. 얼마 안 남았는데.
영화 이야기를 꺼내자 남자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남자도 관심이 있다는 듯이 경수 옆으로 다가와서 귀를 기울였다.
거의 다 끝났습니다. 컷 몇 개만 수정하면 완성입니다. 내일까지 전달드릴 수 있습니다.
고생했네.
오늘 퇴원하고 마무리해서 내일 오전에 파일 전달드리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바로 퇴원 수속 진행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구루가 지연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는 찰나, 경수가 구루를 붙잡았다.
구루님.
구루가 뒤돌아서 경수를 응시했다.
오늘 마지막으로 지연이 촬영하고 내일부터 수행에 들어가겠습니다.
좋아.
구루는 지연을 데리고 입원실을 나갔다. 남자는 수행이라는 말을 듣고 표정을 찌푸렸다. 남자가 불쾌해하는 것 같아 경수는 막힌 것이 쑥 내려가는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영근 씨,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정연은 자신의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영근은 경수의 말에 답하지 않고 자신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연은 말을 이어갔다.
경수가 왜 피디가 되었는지 알고 있으세요?
영근은 정연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담배 연기를 크게 내뿜었다. 정연은 영근의 담배 연기가 이야기를 계속해달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연은 더는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싶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고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만 이어졌다.
정연씨가 재능을 알아보신 거 아닙니까.
결국 영근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답했다. 마침내 대화의 주도권은 정연에게 왔다.
그런 거 말고요. 본질적인 이유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경수를 잘 모르시네요.
정연씨보다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영근은 자신이 정연을 한 차례 속인만큼 자신도 정연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고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지만 정연의 도발에 영근은 발끈해서 답했다.
많은 걸 알면 뭐 해요. 중요한 본질을 알아야죠.
그게 무엇입니까.
말 안 해줄 건데요.
그럼 왜 말을 꺼내셨습니까.
그냥 열받으라고 말했어요, 궁금하죠?
정연은 땅에 담뱃재를 털고 쓰레기통에 담배를 버린 후에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영근도 질세라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싫은데요?
그럼 됐습니다.
한동안 또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만 이어졌다. 정연은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영근이 불타오르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정연은 영근이 경수를 또 다른 위험에 빠트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되레 그래서인지 영근을 놀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영근은 꾹 참고 재차 물었다.
부탁드립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흠…. 이거 저만 아는 건데.
제발 부탁드립니다.
영근이 공손하게 재차 부탁하자 정연은 그제야 못 이기겠다는 표정을 짓고 말하기 시작했다.
비슷했대요. 자기가 겪은 세계 하고.
피아노 말씀이십니까.
피아노도 피아노인데, 다른 본질적인 거요.
대체 그 본질이 무엇입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이 똑같았데요. 자신이 보던 사람들이랑.
영근은 참을성 있게 정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았대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하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하고. 물론 영근 씨는 신진리교랑 복음교회랑 제가 똑같이 말하는 게 기분 나쁘시겠지만.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영근은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일종의 사명감이랄까, 선민의식이랄까, 그 비슷한 게 있다는 거죠. 나는 이 행위를 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마음, 여기서 행위라면 피디로서는 드라마 제작, 종교에서는 믿음의 길을 걷고 그 길을 전도하는 거겠죠?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이상주의적인 길을 걸어간다는 데서 느끼는 성취감이랄까요. 영근 씨는 그런 마음 없으세요?
없습니다.
있으실 텐데.
없습니다.
하지만 영근은 정연에게 대답하면서 자신도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부정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면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고,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데 기여한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이 있었다. 이 두 감정은 영근의 삶을 지탱하는 추였다.
하나님을 믿으시지 않으세요?
믿습니다.
그럼 이해는 되시겠네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적응이 너무 쉬웠대요. 마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하고 복음교회, 그리고 신진리교 사람들하고 너무 비슷했대요. 따지고 보면 드라마를 만드는 직업은 일반 회사원들, 공장이나 건설현장 노동자본들, 아니면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보다 덜 생산적인 일이 잖아요? 드라마 안 보고는 살 수 있지만, 커피 없이, 집 없이 하루를 못 보내잖아요. 편의점 안 가고 살 수 있어요?
살기 어렵죠.
그러니까요. 경수 말을 듣고 저도 피디를 그만둘까 했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실상 세상에서 가장 덜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되지도 않는 선민의식을 가지는 것 같았어요. 드라마 만드는 것보다는 은행에 입사해서 한 명이라도 대출 승인을 해주는 게 더 세상에 기여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은행원을 비하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드라마 피디를 비하하는 거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실제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저희 엄마 같은 사람이죠. 매일 드라마 재미없다고 욕하면서도 드라마를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저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창작 그 자체에 의미를 하나도 안 두고,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제 고용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수 덕분이죠. 선민의식에서 저를 꺼내준 게. 그런데 기자도 비슷할 거 같은데.
영근은 경수의 말에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경수와 영근은 한동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영근은 두 개비의 담배를 더 피우고 나서야 경수의 말에 답했다.
그런 게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결국은 선민의식이 되는 거죠. 감춰진 사실을 전달한다는 자부심이 스스로가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선배들을 종종 봤습니다. 그런 선배들은 결국 정치가의 길을 걷다가 패망하는 경우가 많았죠. 물론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오는 선민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선민의식이 아니라, 당연하고 올바른 길입니다.
영근은 경수가 묻자마자 바로 답했다.
불쾌하네요.
불쾌하실 줄 알고 물어본 거예요.
한동안 둘 사이에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오랫동안 흘렀다.
하나님이 항상 옳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을 전달하는 사람들은요? 지금 저기 경수 입원실에 있는 구루라는 양반도 하나님의 말을 전달한다고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자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겁니다.
그러면 다행인데, 아직은 못 받은 거 같네요. 받을 수 있을까요?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심판을 받을 겁니다.
그걸 영근 씨가 어떻게 아세요?
네?
영근 씨도 하나님 말의 전달자예요? 하나님의 뜻이 지금 저자가 그대로 활개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저 자에게 큰 벌을 내릴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하나님은 항상 그러셨습니다.
일단 알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을 전달하는 자들은, 아 알겠어요. 그니까 하나님의 말을 전달한다고 스스로 칭하는 자들은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영근은 마지못해 정연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나님의 말을 전달하는 자는 하나님처럼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죠?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그렇습니다.
휴, 이제야 동의하시네요. 힘들다.
왜 하나님 말씀을 감히 꺼내신 겁니까?
제가 더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정연이 이 말을 시작으로 입을 떼자, 이야기를 듣는 영근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하지만 정연은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당신을 반타 블랙의 세계에서 꺼내 볼게. 당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건 좀 짜증 나는데. 사실 나, 당신 좀 마음에 들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