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 씨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저를 태우고 왔어요?
그건….
알겠어요. 좀 쓸데없는 자존심 좀 그만 부려요. 그나저나 이런 차는 어떻게 빌려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영근은 정연과 함께 쓰레기 수거 차를 타고 영근이 신진리교 마을을 살필 때 잠복하던 버스 정류장에 잠복했다. 둘은 미화원 옷을 입은 채 망원경으로 신진리교 마을 정문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여기 안 들키는 거 맞죠?
몇 개월을 잠복했는데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눈에 안 띄는 공간이고, 혹시 몰라 차량도 바꿨으니, 괜찮을 겁니다.
괜찮다고 말하자마자 신진리교 문 앞을 지키는 경비원이 쓰레기 수거차 쪽으로 걸어왔다.
영근 씨! 안 들킨다면서요.
다행히도 경비원은 버스 정류장 근처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고 다시 경비 초소로 돌아갔다.
호들갑 좀 그만 떠십시오.
하…. 진짜.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다시 망원경으로 신진리교 입구를 주시했다. 한 시간, 두 시간째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겠죠?
어느새 영근도 정연에게 전염되었는지, 호들갑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호들갑 좀 그만 떨어요.
경수는 불안해하는 영근에게 말했다.
하…. 잠시만요! 나온다.
경수는 가방을 멘 채, 한 손은 지연의 손을 꼭 잡은 채 정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영근은 재빨리 운전해서 바로 경수가 나오고 있는 정문으로 향했다. 경수와 지연은 정연의 손을 잡고 트럭에 올라탔다.
어떻게 나왔어?
정연이 경수에게 물었다.
LSD로 기절시키고 나왔어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영근은 바로 근처 공사 중인 터널로 향했다. 영근이 최근에 취재한 터널 공사 현장이었다. 최근에 완공되어 CCTV가 없는 근처 유일한 터널이었다. 한참을 내달렸다. 터널 앞에는 번호판이 같은 검은 밴 두 대가 놓여 있었다.
이제 갈라지죠. 정연씨, 잘 부탁드립니다.
네. 영근 씨도요. 경수야, 하드 줄래?
네. 언니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네. 언니도 조심하세요.
탈출 작전을 위해 정연과 영근이 고안한 방법은 두 차로 나눠 타는 것이었다. 신진리교의 추격을 대비해야 했고, 곧바로 방송국으로 가서 경수가 만든 영상 송출도 준비해야 했다. 두 차로 나눠서 진행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영근에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 있었다. 정연은 차를 옮겨 타자마자 바로 액셀을 밟았다. 영근의 차량도 마찬가지였다.
정연은 2시간이 걸릴 거리를 1시간 만에 도달했다. 하지만 바로 문제가 생겼다. 방송국 앞에 신진리교로 보이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신진리교의 정보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연은 자신의 차량을 눈치채지 못하게 방송국 앞에서 바로 핸들을 꺾었다. 그리고 바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은아.
네.
지금 촬영 상암이지?
네. 후라이엔터 건물에 있는 망치고기 집에서 하고 있습니다.
누구 촬영이야?
안은지 배우하고 김유진 배우 촬영입니다.
언제 끝나?
지금 막 컷이에요.
김유진 매니저 바꿔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어 매니저가 전화를 돌려받았다.
네, CP님 잘 지내시죠? 요즘 통 촬영장에서 못 봬서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매니저님,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매니저님 차로 김유진 배우랑 같이 저 HBC까지 좀 데려다주세요,
네?
설명은 내일 드릴게요. 혹시 가능하실까요?
그럼요, 지금 어디세요?
저 촬영장 바로 앞이에요.
정연은 김유진 배우의 차로 방송국에 도착해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신진리교의 감시를 뚫는 데 성공했다. 정연은 바로 하드 내 영상을 회사 서버로 옮겨 확인하기 시작했다. 영상은 경수에게 들은 대로였다. 지연이 벽장 속에서 보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서 이후에 지연이 보는 세계와 신진리교의 실상을 교차하는 구성이었다. 완성도가 상당했다. 특히 경수를 죽이려는 남자와 신진리교의 구루의 얼굴이 겹치면서 구루가 매달 진행하는 여성 신도 예배와 은총, 그리고 이니시에이션의 실상을 폭로하는 부분은 감탄이 나왔다. 40분이 순식간에 흘렀다. 흔한 자막 오타 하나 없는 완벽한 영상이었다. 오케이….라고 정연이 중얼거릴 찰나, 갑자기 경수의 얼굴이 가득 찬 화면이 나오면서 경수의 고백이 이어졌다. 정연이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전의 유려한 애니메이션 없이 경수가 온전히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영상이었다. 경수의 고백은 벌거벗은 아버지가 매일 자신을 괴롭히는 환상까지 이어졌다. 정연은 경수가 자신이 예상치 못한 내밀한 부분까지 고백한다는 점에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내 마지막으로 경수가 하는 말을 듣고 정연은 자신이 불안해하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이제 저는 제가 애써 외면했던 지옥에서 한 아이를 구출하고, 저도 지옥에서 해방되고자 합니다.
경수가 택하려는 세계가 이제야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정연은 바로 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경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정연은 바로 영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바로 영근의 아지트로 향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영근에게 전화가 왔다.
영근 씨. 설마….
경수 씨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로 갔습니다.
정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정연은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편집을 하던 피디들과 믹싱과 색보정을 하던 감독님이 울음소리에 하나둘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곧 사람들이 정연을 둘러쌌다. 하지만 너무나 서럽게 우는 정연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방송국에는 한동안 떠내려갈 것 같은 정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