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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an 19. 2022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와 은희경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곤 한다.

한국문학이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발급한 '비자'라는 평을 받는 책 <단 하나의 눈송이>는 일본 작가 사이토 마리코가 한국어로 쓴 시집이다. 그녀의 시집을 찾아보게 된 것은 아래의 시를 우연히 접하고서였다.


< 눈보라 >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를 하나씩 뽑는다. 건너 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 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 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 맞을 때까지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책


잔잔한 시의 여운이 가슴 깊이 밀려들어와 마음을 흔들었다. 당장 원문이 실린 시집을 구해서 읽었다.


사이토 마리코는 시인이자 번역가로 1960년 일본 니가타에서 태어나 메이지대 역사학과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가 재학 중 한일 학생모임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20대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1991년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1992년 초여름까지 연세대와 이화여대 어학당에 다녔고, 그 사이에 50편 이상의 시를 썼다. 윤동주 시인의 비석이 서있는 연세대 교정에서 그의 후배로서 느낀 소회를 '비 오는 날의 인사'라는 시로 쓰기도 했다.

   

1993년 한국어 시집 '입국'을 출간했고, '단 하나의 눈송이'는 아마도 1990년대 초에 출간한 이 시집을 조금 손봐서 재출간한 듯하다. 뒷장 '시인의 말'에 한국 출판사의 권유로 23년만에 다시 출간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보면.(그런데 책의 초판 인쇄가 2018년이라 아마도 2016년에 제안을 받고, 책의 존재조차 잊고 있던 중이라 고민하다가 결심을 한 뒤에 천천히 글을 좀더 다듬어서 2018년에 책이 나온 듯하다)

 

2014년부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카스테라』, 『핑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희랍어 시간』(한강), 『아무도 아닌』, 『야만적인 앨리스 씨』(황정은) 등 한국 문학작품들을 번역하였다. 특히 『카스테라』는 제1회 일본번역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번역에 있어 인정을 받고 있으며, 한국문학을 일본에 널리 알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신 분이다.


내가 우연히 보았던 그 시는 '눈보라'의 2절이었다.

시집에는 1절이 더 있었다.


1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저 사람 역시 지금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보다 높이 쌓인 눈, 사람이 가까스로 빠져나갈 만한 좁다란 길 양쪽에서 나와 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걸어가는 거다. 사람들은 언제 맞스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시작됐는가? 하여튼 둘은 서로 다가간다. 지상에 단 둘이만 남겨져버린 것처럼 마침내 마주친 그 순간, 한 사람이 빠져나가는 동안 또 한 사람은 한편으로 몸을 비키며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한다. 그때 둘이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것이 내 고향 설국의 오래된 습관이다.


 "눈보라 속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온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스치기는 시작된 것이다. 누가 먼저 길을 양보하느냐는 그때가 와야 알 수가 있다.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눈보라 속 멀리서 걸어오는 조선의 모습을 만났다.

 

아직도 같은 눈보라 속을 다니고 있다.


- 도서검색 창에 '단 하나의 눈송이'를 치면 은희경의 소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란 책이 검색창에 먼저 뜬다. 네이버 검색에서도, 인터넷 서점에서도, 동네 도서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 책이 자꾸 같이 뜨는 걸까? 궁금했다. 아무래도 '눈보라'에 나온 한 구절을 그대로 가져온 제목을 보니,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1995년에 데뷔해 올해로 등단 28년차인 은희경의 다섯번째 소설집이자, 열두 권째 작품집인 이 책에는 여섯 편의 소설들이 수록되어있고, 제일 첫 번째 작품 제목이 책의 제목이다. 1976년 크리스마스 무렵 안나와 루시아라는 열아홉 살 소녀에게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의 첫 장에 바로 사이토 마리코의 시 '눈보라' 2절이 소개되어있다.  


루시아의 남친이 된 요한이라는 남자애를 사이에 두고 혼자서만 감정을 키워가다가 크리스마스날 아무도 모르게 그 감정에서 도망쳐나와야했던 안나의 이야기는 두 소녀가 서로 자신의 눈송이를 정해두고,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가다가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놀이와 오버랩된다.

은희경이 사이토 마리코의 '눈보라'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소설을 보면서 인상깊게 본 구절은

다음 부분이다.


- 다음 편에 이어서


* 눈사진은 모두 펌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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