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가다가 오랜만에 다른 회사로 이직한 반가운 얼굴인 옛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알차게 일을 끝마친 동료였다.
거리 모퉁이에 안착하여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관심사는 무엇인지를 얘기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서로 간의 대화가 거의 끝날 무렵 동료는 한마디를 던졌다.
'근처에 사니까 우리 나중에 밥한끼 하자'
'응 그래 꼭 보자~ 말 나온 김에 다음 주 어때? 난 수요일 괜찮은데'
순간 영하의 기온에 갑작스럽게 얼어버린 한마리 새처럼 동료는 어버버를 연거푸 내뱉으며 쉽게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먼저 연락한다는 말만 남기고 헤어졌다.
그 후 그와 나중에 볼일은 없었다.
그냥 '나중에'라는 말만 남기고 각자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와 만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나중에' 아니면 '조만간' 보자고 할때 약속의 의중을 묻고 확실하게 날짜를 정하자고 하면 알 수가 있다.
만날 의향이 있는 사람은 한달 후라도 약속을 잡으려 할 것이고, 그렇고 그런 사이에서 잊혀져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더라도 약속을 잡지 않으려 한다.
상대방은 그냥 으레 하는 말로 슬쩍 넘기려고 했는데 '진지하게 갑자기 왜 이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우리는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온다'라는 사실처럼 필연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나와 내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는지 아닌지를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항상 생각해봐야 할 것은 '누군가 당신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는가?'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소중하게 생각하면 겉에 배어 나오고, 접점을 만들며 시간을 귀중하게 만든다.
귀중하게 만난 사람과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받은 것처럼 즐겁다.
그 사람을 나의 소중한 사람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사람을 대하는게 쉬워져야 하는데 바닥에 떨어져 잘게 부서진 과자처럼 주워 담기가 힘들다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이란 온전한 자신 안에서의 이해일뿐이다.
내가 맺은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말할 때 나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입막음해버리는 사태도 발생한다.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새어 나오는 미소를 충족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스쳐 지나갈 것은 잊혀지고, 잊혀진것은 꺼내기 힘들다'
꺼내어 다시 돌보려 했을 때 깨져있으면 영원의 시간 안에 꽁꽁 묶어 둘 수밖에 없다.
그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로또를 맞추는 것보다 훨씬 쉽지만 더 많은 소중함을 얻을 수가 있다.
'나중에'보다는 콕 집어 '정확한 날에'를 선택하면 그 사람의 시간과 삶을 얻을 수 있다.
오늘부터라도 삶을 얻을 수 있는 한마디를 외쳐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