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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17. 2024

무엇을 팔 것인가

정리할 물건은 물욕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작심하고 중고 거래에 나서서 빈티지 상품을 지속적으로 파는 사람도 있긴 하겠으나,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팔 물건이 공급되어야 계속 팔 수 있으니 여기서는 보유하고 있던 물건을 처분하는 일반적 경우만을 다루기로 한다.


자, 그럼 무엇을 팔 것인가? 이상한 질문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방송에 출연해도 될 만큼 독보적인 생활 방식을 체화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써서 없애버리는 물건만 소비하지는 않기 때문에 물건은 쌓이기 마련이고, 그중에는 처분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저거 쓰지도 않는데 버리자니 아깝고 놔두긴 공간 낭비고 어쩌나…….’ 싶은 물건이 명확히 있는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이런 사람들 중에서 처분하기로 마음먹은 물건이 확실하고, 그 이상으로 물건을 정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번 회차는 굳이 다 읽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치울 물건이 많거나 물건을 좀 줄여야 하는데 감이 오지 않는 사람, 삶의 기조를 바꾸어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지금부터 다룰 판매 전 단계 이야기를 읽어보길 권한다.


참고로 나는 취미가 모조리 공간을 심하게 점유하는 것들이라 자나깨나 공간 확보에 골몰해야 하는 운명인데, 그 취미들이란 바로 독서와 보드게임, 등산이다. 독서는 말할 것도 없이 부동산의 적으로 정평이 났고, 보드게임은 중급자 이상을 대상으로 한 게임이라면 대체로 하나가 책장 한 칸의 10센티 가량을 점유해서 하나 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등산은 이론적으로는 등산화 하나만 있으면 일상용품으로도 즐길 수 있는 취미지만 할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려는 욕망이 자극되는 터라 장비가 하루하루 늘어나는 것을 막기 힘들다. 이러니 남는 공간이 있을 턱이 있나…….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무엇을 모으거나 관련 용품이 늘어나는 취미가 있다면 처분할 물건을 고르는 일은 정말로 중대한 과정이고, 몸에 잘 익혀둬야만 하는 생존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이 워낙 널리 잘 알려진 터라 이 부분은 미니멀리즘을 다루는 책이나 방송을 참고해도 좋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문적인 미니멀리즘 이야기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기준이 너무 극단적이라 수집 욕구가 강한 사람이 도통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집품이란 어차피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소유한 것만으로 가슴이 뛰기 마련이다. 그런데 1년간 쓰지 않은 물건이나 가슴이 설레지 않는 물건을 버리라니, 그게 될 턱이 있나.


그러니 미니멀리즘 강좌에서는 필요한 부분만을 취사선택하자. 내가 배운 것중에서 꼭 추천하고 싶은 요령은 치워야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물건이 보이거나 떠오르는 족족 모아두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공간도 없는데 어디 물건을 또 보기 싫게 모아두란 말이냐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바로 핵심이다. 거슬리지 않게 깔끔하게 잘 모아서 어디 넣어두면 그건 처분할 물건을 모은 게 아니라 수납 공간을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이러면 처분해야겠다는 결심이 흐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그런 일거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도 망각하게 된다. 따라서 처분할 물건은 엄청나게 눈에 밟히게 모아두는 게 이상적이다. 물론 일상 생활은 해야 하니까 침대 한복판에 모을 것까지는 없고, 현관이나 방문 옆처럼 동선에서 늘 보게 되는 곳 정도면 적당하다. 나는 빠르게 처분할 것들 중에서 크기가 작은 물건은 일상적으로 열고 닫는 창문 앞에 박스나 쇼핑백을 두고 모아놓는데, 창문에 다가갈 때마다 거슬려서 딱 적당하다 싶다.


실제 물건을 모아두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외투 한 두 벌만 해도 아무곳에 쌓아뒀다간 공간 점유가 심각해질 뿐더러 물건도 상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무슨 업무도 아니고 귀찮게 목록까지 만드나 싶을 수도 있겠는데, 처분하려는 물건이란 보통 쓸 일이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어느날 ‘이건 팔아야겠군’하더라도 돌아서면 볼 일이 없으니 그 물건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기 쉽다. 망각하는 쪽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인간의 뇌는 생존을 위해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치워두는 방향으로 발달했고, 쓰지도 않고 볼 일도 없는 물건에 대한 정보 따위는 방바닥의 나뭇결 무늬만큼도 가치가 없는 것이니 어쩌겠는가?


나는 처분할 물건이 생길 때마다 일정 관리에 사용하는 투두 리스트 앱에 기록하고 있다. 날짜와 시간은 물론이고 우선순위도 정할 수 있어서 대단히 유용한데,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 스마트폰에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는 메모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길 권한다. 메신저로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메모를 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키보드를 여러 번 두드리는 일을 택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텍스트를 길게 쳐서 목록을 작성한다는 행위 자체를 해본적이 없거나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때는 책상에 메모지를 두고 손으로 적는 게 자꾸 상기하기엔 더 좋을 수도 있다. 손으로 글씨 쓰기를 원치 않는 경우에는 사진을 찍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조그만 화면의 키보드를 여러번 두드리는 것보다 간단하고, 처분할 물건의 모습이 명백히 저장되니 장점도 많다. 휴대전화 카메라도 사용할 수 없고 목록도 작성할 수 없는 경우에는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건 선택지로 제시하는 게 아니니까 ‘난 기억력도 좋고 정리할 것도 별로 없으니까’하지 않길 바란다. 기록되지 않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정리를 하긴 해야겠는데 뭘 정리해야 할지 아무리 둘러봐도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니 처분 대상을 고르는 방법도 간단히 다뤄야겠다. 보통 미니멀리즘 강좌에선 쓰지 않는 물건을 모조리 치우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물건을 다 박스에 포장하고 필요한 것만 꺼내쓴 다음 몇 달 뒤 박스에 남은 물건을 없애라고도 한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물건이 얼마나 적은가 알아보기에는 좋은 방법이지만, 과도한 소비 생활에 경종을 울리는 게 정리의 목적은 아니니 나는 이것보다 기준을 낮춰서 ‘충분히 대체 가능한 물건’을 주로 골라낸다. 어두운 색 패딩은 하나만 남기기, 백팩은 여행용 하나, 일상용 하나씩만 남기기…… 이런 식으로 비슷한 것들 중 가장 나은 것 하나만 남기는 것이다.


(비슷한 물건들을 모으는 디테일한 욕망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물건이 용도별로 하나씩은 남으므로, ‘나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과소비와 자원 낭비의 죄책감에 짓눌릴 필요 없고, 나중에 ‘그건 놔뒀어야 하는데!’하고 후회할 일도 줄어든다. 반대로 물건을 몇 달 안 썼다는 이유만으로 처분 리스트에 올리다 보면 리스트가 너무 길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피로감이 심해져 작업 자체가 흐릿해진다. 그러느니 애초에 널널한 기준을 적용하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인데…… 사실 이 경우에도 대체 가능한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다. 검은 신발로 군청색 신발을 대체할 수 있을까 없을까 따위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이것도 만만치 않게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흔히 벌어지는 ‘똑같다니? 이것 봐, 다 다르단 말이야……’ 같은 상황이다. 이건 그 물건에 대해 어지간히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신 판단해줄 수 없다. 소유주가 어느쪽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어디부터 잘라낼지 잘 생각해봐야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지만, 용도가 거의 같은데 디자인과 색상 때문에 처분이 난감한 물건들이 있다면 가장 활용도가 낮은 것, 손이 가지 않는 것부터 골라내는 게 무난하다. 특정한 행사, 상황에만 쓸 수 있거나 특별한 조합으로 구성해야만 어색하지 않은 의복이나 소품이 이에 속한다. 물론 ‘핼러윈에만 입는 옷이긴 한데 그때가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워서 도저히 처분할 수 없다’ 같은 사연이 있다면 억지로 팔아치울 생각을 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 옷이 몇 벌이나 되면 정리의 우선순위에 올려야 하겠지만, 이건 미니멀리즘 얘기가 아니니 뼈를 깎는 심정으로 정리를 각오하지 않아도 된다.


‘특정한 상황’에 신체 치수도 들어가겠다.  ‘살 조금만 빼면 입을 수 있는 옷’ 얘기다. 이것도 사람마다 다른 경우라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1년 넘게 허리가 줄지 않아서 예전 사이즈의 바지를 모조리 처분했다. 지금 맞지 않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운동 시간을 늘리거나 식사량을 줄일 여유가 없으니 앞으로도 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이즈가 변하지 않을 것 같다면 옷들을 처분하기로 하고, 변할 것 같다면 놔두면 되겠다. 물론 입어야 할 옷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 다이어트의 동력이 되기도 하니 옷을 정리하지 않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나쁜 것은 오로지 비좁은 공간뿐이다. 하지만 물욕이 있는 한 언젠가 공간은 고갈되기 마련이고, 물욕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그러니 물살에 밀려나면서도 노를 저어 나아가길 계속하듯, 우리는 끊임없이 물건을 고르고 버리고 나누고 팔아야 하는 것이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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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https://millie.page.link/ExY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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