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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기억: 4

반복되는 문장들

by jeromeNa
이 작품은 고고학적,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는 무관합니다.


독경이 계속되었다. 스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일체중생 실아미타불..."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기를. 현진은 그 뜻을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보다 소리 자체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소리의 떨림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 진동이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방 안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향 연기와 사람들의 체온이 뒤섞여 만든 독특한 밀도였다. 누군가 기침을 했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독경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 작은 기침 소리마저도 의례의 일부가 되어 공간에 녹아들었다.


목탁 소리가 빨라졌다. 똑—똑—똑. 나무가 시간을 두드리는 소리. 그 울림이 갈비뼈 사이로 스며들었다. 독경의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겨울임에도 열기가 올랐다. 회색 승복의 등 부분이 젖어들었다. 독경도 일종의 노동이었다. 영혼을 위로하는 신성한 노동.


독경이 끝났다. 스님이 합장하고 물러났다. 사람들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긴장이 풀리는 소리였다. 상주가 스님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 이제 저녁 드시죠.


부녀회장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려 비틀거리는 이도 있었고, 잠들었다가 깨는 아이도 있었다.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무게를 받아냈다.


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된장국, 나물, 전, 김치. 소박했지만 정갈한 차림이었다. 아주머니들이 국을 퍼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뜨거운 김이 그들의 얼굴을 스쳤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가 손수건으로 닦였다.


현진은 구석 자리에 앉았다. 뜨거운 국그릇이 놓였다. 된장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입에 넣었다. 짭짤하고 구수한 맛이 혀에 퍼졌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열기가 가슴까지 데웠다.


- 그 양반, 죽기 전날까지도 밭에 나가셨어.


옆자리의 노인이 무를 집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 아흔 넘은 나이에도 호미 놓지 않으셨지.


다른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등에도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햇볕에 그을고 세월에 마른 손이었다.


- 평생 그렇게 사셨어. 해뜨기 전에 나가서 해 진 뒤에 들어오고.


그 말들이—어느새 다른 말들과 겹쳐졌다.


일주일 전 오후, 연구실. 점심 후의 나른한 시간. 커피 향과 모니터의 푸른빛이 공간을 채웠다.


- 이거 좀 이상해요.


박재원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신들이 노동에 지쳐 반란을 일으켰대요.


이수진이 의자를 굴려왔다.


- 신들이?

- 3,600년 동안 운하를 팠다고. 그래서 엔키가 제안하죠. 인간을 만들어 대신 일하게 하자고.


침묵. 커피 머신의 웅웅 거리는 소리만.


- 데이터 보내주세요.


현진이 말했다.


- 패턴 분석에 넣어볼게요.

- 여기.


박재원이 파일을 공유했다.


- 쐐기문자 원문이랑 번역본 둘 다 있어요.


현진이 데이터를 받아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화면에 텍스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AI가 단어들을 분류하고 빈도를 계산했다.


- 노동 관련 어휘가 엄청 많네요.


현진이 그래프를 가리켰다.


- 73%가 일, 짐, 멍에, 땀 같은 단어와 연결되어 있어요.


이수진이 턱을 괴었다.


- 다른 문명의 창조신화는 어떤가요?

- 제가 확인해 볼게요.


박재원이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 이집트의 크눔 신도 비슷하네요. 도공의 물레로 인간을 만드는데, 목적이 파라오를 섬기고 신전을 짓는 거래요.


로시가 노트북을 들고 왔다.


- 중국 신화 번역한 게 있어요. 여와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드는데, 처음엔 정성껏 하나씩 빚다가...

- 나중엔?


이수진이 물었다.


- 귀찮아서 새끼줄에 진흙 묻혀서 휘둘렀대요. 정성껏 만든 건 귀족, 대충 만든 건 평민이 되었고.


박재원이 웃었다.


- 계급의 기원이 제조 과정이었네.

- 그리스 신화도 확인해 봐요.


이수진이 박재원에게 말했다.


-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에 나와요.


박재원이 책을 뒤적였다.


-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에는 인간이 노동 없이 살았는데, 그 후로는 땀 흘려야만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고.

- 프로메테우스 신화랑도 연결되네요.


로시가 말했다.


- 불을 훔쳐준 것도 결국 기술, 즉 노동을 가능하게 한 거니까.


현진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창조신화 텍스트를 모두 넣고 분석 돌려볼게요.


키보드 소리가 연구실에 새겨졌다. 타닥, 타닥. 현대의 노동 소리. 프로그레스 바가 차오르는 동안, 수천 년의 텍스트가 알고리즘 속을 흘렀다.


- 결과 나왔어요.


현진이 모니터를 돌렸다.


- 수메르/바빌론 73%, 이집트 68%, 그리스 61%, 중국 57%... 모두 노동 관련 어휘가 절반 이상이네요.

- 왜 그럴까요?


이수진이 물었다.


- 왜 모든 문명이 인간 창조와 노동을 연결시킬까?


침묵이 흘렀다. 커피 머신이 낮게 웅웅 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 농업혁명의 영향?


박재원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 그런데 시대가 안 맞아요.


이수진이 반박했다.


- 농업혁명은 기원전 1만 년경, 이 텍스트들이 기록된 건 기원전 3-4천 년경이잖아요.

- 구전으로 오래 전해졌을 수도...


로시가 말했다.


- 아니면,


박재원이 책을 덮으며 말했다.


- 우르크 시대, 기원전 4천 년경에 갑작스러운 도시화가 일어났죠. 그때 뭔가 사회구조의 대변화가 있었을지도.

- 수메르 왕명표도 그때부터죠.


이수진이 덧붙였다.


-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현진은 화면의 데이터를 보며 생각했다. 패턴은 분명했다. 모든 문명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었다.


- 창세기도 비슷해요.


로시가 말했다.


- 에덴에서 추방된 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으리라.'

- 노동의 저주인지 운명인지...


박재원이 중얼거렸다.


빈소로 돌아온 현재. 노인들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 요즘 젊은이들은 농사 안 짓는다며.

- 힘든 일이니까.

-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지. 먹고살려면.


먹고살려면. 그 짧은 말이 긴 메아리를 만들었다. 고인의 평생이 그 글자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 고인도 평생 그 말을 살았다. 먹고살기 위해 땀 흘렸다.


저녁이 깊어가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그릇 씻는 소리가 들렸다. 물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 또 다른 노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손자가 조용히 말했다.


- 씨앗 얘기였대요. 봄에 뿌릴 씨앗을 잘 보관하라고.


씨앗. 다음 노동을 위한 약속. 죽는 순간에도 그는 순환을 생각했다. 씨앗에서 열매로, 열매에서 다시 씨앗으로. 노동도 그렇게 이어진다. 손에서 손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조문객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현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주에게 인사를 했다.


- 내일 발인 때 뵙겠습니다.


상주가 손을 잡았다. 거칠고 두꺼운 손이었다. 평생 일한 손. 아버지를 닮은 손.


밖으로 나오니 별이 빛나고 있었다. 북두칠성이 선명했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현진은 생각했다. 데이터는 분명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문명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흙과 노동, 창조와 고역. 그 반복 속에 숨은 의미가 있을 터였다. 북두칠성처럼 선명하지만, 손에 닿지 않는. 차가운 별빛이 얼굴을 스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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