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조각의 발견
"왕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왕권이 에리두에 있었다. 알루림이 28,800년을 다스렸다"
— 『수메르 왕명표』, 기원전 2100년경
새벽이었다. 현진은 다시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전날 밤 서울에 도착해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새벽 네 시에 다시 출발했다. 발인은 아침 여덟 시.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며 나아갔다. 빛의 원뿔 밖은 무(無)였다. 첼로 선율이 그 무를 채웠다. 낮고 깊은 울림, 죽음을 향해 가는 새벽의 음악.
어젯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어 창조신화 데이터베이스를 다시 확인했다. 패턴은 분명했다. 모든 문명이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 패턴이 반복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을 진입로가 보였다. 어제와 같은 길이지만 새벽의 풍경은 달랐다. 안개가 마을을 삼키고 있었다. 논둑 위로 물안개가 피어올라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웠다. 세계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창조 이전의 시간 같았다. 마치 땅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속도를 줄였다. 안개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발인 준비가 한창이었다. 상여가 마당에 놓여 있었고, 꽃장식을 다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오색 천과 종이꽃이 상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죽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산 자들의 노력이었다.
현진은 빈소로 들어갔다. 밤새 지킨 가족들이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상주의 눈은 더 깊게 패여 있었다.
"왔구나." 짧은 인사였다. 현진도 고개를 숙였다. 많은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염사가 들어와 발인 절차를 설명했다.
- 이제 관을 상여로 옮기겠습니다. 상주께서는 앞장서 주시고, 가족분들은 뒤를 따라 주십시오.
상여꾼들이 들어왔다. 흰 두건을 쓰고, 짚신을 신은 모습이었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마을 상여계였다. 그들의 손에는 굵은 밧줄이 들려 있었다. 관을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구령에 맞춰 들어 올렸다. "하나, 둘, 셋!" 무거운 관이 공중에 떴다. 여섯 명의 장정이 힘을 합쳐 관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느렸지만 안정적이었다.
관이 빈소를 나서는 순간, 누군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고인의 딸이었다. "아버지!" 그 외침이 새벽 공기를 찢었다. 다른 가족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곡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개들이 짖기 시작했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온 마을이 죽음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상여에 관을 올렸다. 꽃으로 둘러싸인 관이 마치 꽃배처럼 보였다. 상여꾼들이 상여를 들어 올렸다. "어허 어허 어너리 넘차" 상여소리가 시작됐다. 선소리꾼의 구성진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퍼져나갔다.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주가 맨 앞에 서서 길을 인도했다. 만장을 든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현진도 그 행렬에 합류했다. 발걸음을 상여의 리듬에 맞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을 길을 지나며 상여는 몇 번 멈췄다. 고인이 자주 가던 곳들이었다. 경로당 앞에서 멈췄을 때, 노인들이 나와 서 있었다. 그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자신들의 차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고인의 집 앞에서 상여가 다시 멈췄다. 대문이 열렸다. 며느리가 쟁반에 술과 음식을 들고 나왔다. 고인을 위한 마지막 식사였다. 상여꾼들이 술을 땅에 부었다. 맑은 액체가 마른 흙에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검은 얼룩이 남았다.
맑은 술이 흙에 스며드는 그 순간—다른 스며듦이 겹쳐졌다.
며칠 전 새벽. 연구실의 모니터 빛이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연구실에서 혼자 남아 작업하던 밤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모니터 빛만이 어두운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현진은 새로운 알고리즘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깨진 점토판의 텍스트를 복원하는 AI 프로그램이었다.
화면에는 대영박물관에서 보낸 스캔 데이터가 떠 있었다. 수메르 왕명표의 일부였다. 기원전 21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판이었다. 일부가 깨져 있었지만, AI가 패턴을 분석해 빈 부분을 예측하고 있었다.
복원된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났다.
"왕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에리두에서 알루림이 왕이 되었다 그는 28,800년을 다스렸다"
현진은 의자에 기대어 화면을 응시했다. 28,800년. 신화적 시간. 인간의 수명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 그런데도 구체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실제로 센 것처럼. 신화와 역사 사이, 그 경계의 흐릿함이 숫자 속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를 썼을까.
프로그램이 다음 부분을 복원했다. 실제 왕명표에 기록된 내용이었다.
"대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갔다 대홍수 후 왕권이 다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키시에서 왕권이 시작되었다"
대홍수. 그것은 수메르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아트라하시스에도, 그리고 성경의 노아 이야기에도 나온다. 왜 모든 문명이 대홍수를 기억하는가.
현진은 다른 파일을 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보낸 아카드 시대 점토판이었다. 노동 계약서였다. 기원전 2350년경의 것이었다.
"계약: 일꾼 10명을 고용함 일당: 보리 2실라 작업: 운하 정비 기간: 수확기까지"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이것이 인류 최초의 노동 계약서 중 하나였다. 4,300년 전에도 인간은 노동하고, 임금을 받았다.
현진은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다. 수메르 시대의 경제 문서들이 수천 개나 있었다. 대부분이 노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신전 건설, 운하 정비, 농사, 목축. 문명의 시작부터 노동은 중심이었다.
화면에 새로운 데이터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베를린 박물관에서 보낸 우르 제3왕조 시대의 점토판이었다.
점토판의 쐐기문자가 말했다.
"남자 30명 - 벽돌을 굽는다.
여자 20명 - 실을 잣는다.
아이 10명 - 신의 심부름을”
4천 년 전의 장부. 숫자로 압축된 삶들.
신전을 위한 노동. 현진은 박재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트라하시스에서 인간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죠."
실제로 수메르 신전들은 거대한 노동 조직이었다. 수천 명이 신전을 위해 일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직물을 짜고, 맥주를 빚었다. 그것이 초기 문명의 모습이었다.
현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워진 커피였지만 카페인이 필요했다. 화면의 데이터를 보며 생각했다. 패턴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전히 모호했다.
상여 행렬로 돌아온 현재. 이제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이 점점 좁아졌고, 경사가 가팔라졌다. 상여꾼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들의 노동이 고인을 마지막 안식처로 인도했다. 땀방울이 떨어지는 자리마다 의례가 새겨졌다. 신들이 하던 일을 인간이 대신하듯, 이들은 죽음을 어깨에 짊어지고 걸었다.
- 여기서 잠시 쉬어가자.
선소리꾼이 말했다. 상여를 내려놓았다. 상여꾼들이 숨을 고르며 땀을 닦았다. 누군가 물을 나눠줬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현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산은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나뭇가지들은 앙상했고, 풀들은 누렇게 말라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새순이 돋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지 끝에 작은 봉오리들이 부풀어 있었다.
- 이 일도 끝이 보여.
상여꾼이 땀을 닦았다.
- 젊은 사람이 없으니.
- 영구차가 대신하겠지.
침묵. 그들도 알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들의 목록에 자신들이 올라 있다는 것을.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현진은 생각했다. 노동의 형태는 변한다. 흙을 파던 손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이제는 기계가 그마저도 대신한다. 하지만 노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 여전히 우리는 일한다. 신들의 짐을 대신 진 그날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