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문장들
이 작품은 고고학적,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는 무관합니다.
"신들이 운하를 파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정비했다. 3,600년 동안 밤낮으로 무거운 노동을 했다. 그들이 부르짖었다: '이 노동을 대신할 자를 만들라'"
— 『에누마 엘리시』, 바빌론 창조 서사시, 기원전 12세기
입관이 끝나고 빈소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은정을 박는 마지막 망치 소리가 사라진 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누군가는 묵념하듯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참았다. 상주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관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물리적으로 확정된 순간이었다.
염사가 나직이 알렸다.
- 이제 성복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상복을 갖춰 입는 의식이었다. 상주와 가족들이 일어섰다. 준비된 상복을 받아 들고 별실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 같았다. 베 상복과 굴건이 그들을 과거의 시간 속 존재로 만들어놓았다. 마치 조선시대 벽화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슬픔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형식이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설이었다.
상주가 관 앞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곡을 해야 했다. 정해진 절차였다. 그가 입을 열자, 낮고 떨리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님, 아버님..." 그 소리에 며느리들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곡소리가 방 안에 물결처럼 퍼졌다. 높았다가 낮아지고, 커졌다가 작아지는 슬픔의 파동이었다.
곡소리를 들으며 현진은 눈을 감았다. 그 울음 속에서 리듬을 들었다. 정형화된 슬픔이지만 진짜 슬픔이었고, 의례적 울음이지만 진짜 눈물이었다. 형식과 진정성이 구분되지 않는 지점. 시의 운율이 그렇듯, 정해진 틀이 오히려 감정의 깊이를 만든다.
그 리듬이—어느새 다른 리듬과 겹쳐졌다.
일주일 전 세미나실. 박재원의 레이저 포인터가 스크린 위를 더듬던 오후. 박재원이 팀내 발표를 하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한국 창세신화의 흙 모티프'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 함경도 창세가를 보면,
박재원이 레이저 포인터로 텍스트를 가리켰다.
- 미륵님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그 속에 입김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되었다고 나옵니다. 이건 놀라울 정도로 히브리 창세기와 유사해요.
이수진이 손을 들었다.
- 그런데 시대를 생각하면, 창세가는 기독교 전래 이전부터 있던 거 아닌가요?
- 맞아요. 그래서 더 흥미롭죠.
박재원이 다음 슬라이드로 넘겼다.
- 독립적으로 발생한 신화가 같은 구조를 갖는다는 건, 인류 보편의 사고가 있다는 증거일 수 있어요.
로시가 노트북을 열며 끼어들었다.
- 제가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봤어요. 각국 창조신화의 핵심 요소를 태깅해서.
화면을 돌려 보였다. 엑셀 시트에 빼곡한 데이터가 들어 있었다.
- 한국 - 창세가: 흙+입김
중국 - 여와: 황토+진흙
메소포타미아 - 아루루: 진흙+침
이집트 - 크눔: 나일강 진흙+물레
그리스 - 프로메테우스: 진흙+아테나의 숨결
히브리 - 야훼: 아다마(흙)+네샤마(생기)
- 패턴이 보이시죠?"
로시가 말했다.
- 물질적 재료 + 생명력. 이 구조가 모든 신화에 반복돼요.
현진이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 제가 AI 분석을 돌려봤는데요.
화면에 그래프가 나타났다.
- 흥미로운 건, 지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유사도가 높다는 거예요. 문화 전파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빈소로 돌아온 의식. 곡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상주가 눈물을 닦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조문객들이 차례로 분향할 시간이었다. 마을 어른들부터 시작했다. 느린 걸음으로 상 앞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정확했다. 평생 반복해온 동작이었다.
한 노인이 절을 하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무릎이 시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는 듯. 옆 사람이 부축했다.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다시 절을 마쳤다. 상주의 손을 꽉 잡은 그의 손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도 곧 간다. 이것이 순리다.
현진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앞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의례는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향을 피우고, 절하고, 손을 잡는 이 행위들. 문자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말이 생기기 전부터도.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 된 순간부터.
그 생각은 다시 연구실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현진이 경주 박물관에서 보낸 데이터를 분석하던 날이었다.
모니터에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토우들의 3D 스캔이 떠 있었다. 사람, 말, 개, 새. 다양한 형상의 흙 인형들이었다. 현진은 그중에서 사람 모양 토우를 확대했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인체의 형태였다. 머리, 몸통, 팔, 다리. 최소한의 요소로 인간을 표현하고 있었다.
- 신라 토우의 제작 기법이 특이해요.
이수진이 설명했다.
- 손으로 빚은 다음 불에 구웠는데, 온도가 그리 높지 않았어요. 800도 정도? 그래서 쉽게 부서지죠.
-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건가요?
현진이 물었다.
- 그럴 수도 있어요.
박재원이 대답했다.
- 순장을 대신하는 부장품이라면, 죽은 자를 따라 저승으로 가야 하니까. 부서지기 쉬워야 영혼이 빠져나가기도 쉽겠죠.
로시가 자료를 찾아 보여줬다.
-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도 비슷한 개념이에요. 실물 크기의 흙 인형들. 다만 규모가 다를 뿐이죠.
- 그런데,
현진이 토우를 회전시키며 말했다.
- 왜 하필 흙일까요? 나무나 돌로도 만들 수 있는데.
이수진이 생각에 잠겼다.
- 흙은... 변화가 가능하잖아요. 물을 넣으면 부드러워지고, 불에 넣으면 단단해지고. 부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 순환이네요.
박재원이 말했다.
- 흙에서 형태로, 형태에서 다시 흙으로.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연구실의 형광등 아래서, 그들은 천년 전 신라인들의 사고를 따라가고 있었다.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된 토우를 보며, 흙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빈소의 분향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향 연기가 방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맑던 공기가 점점 뿌옇게 변했다. 누군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찬 바람이 들어와 연기를 휘저었다.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현진의 차례가 왔다. 향을 집어 들고 촛불에 댔다. 향 끝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가 꺼지고, 붉은 점만 남았다. 그 점에서 가는 연기가 올라왔다. 향로에 꽂고 두 번 절했다. 일어서서 상주와 눈이 마주쳤다. "고맙습니다." 상주의 입모양이 그렇게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의미는 전달됐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현진은 벽에 걸린 고인의 사진들을 보았다. 젊은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사진들이었다. 논에서 모를 심는 사진, 벼를 베는 사진, 추수한 벼 앞에서 웃는 사진. 모든 사진에서 그의 손은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평생을 흙과 함께 산 사람이었다.
-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어요.
옆자리의 중년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고인의 조카였다.
- 사람은 흙을 먹고 사는 거라고. 쌀도 흙에서 나고, 채소도 흙에서 나니까. 결국 흙을 먹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하지만 진실한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흙을 매개로 살아간다. 쌀알 속의 흙, 채소 줄기 속의 흙, 우리 몸속을 순환하는 흙. 먹고 먹히는 순환 속에서, 우리는 이미 흙이다.
부엌에서 아주머니들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 칼질 소리가 들렸다. 곧 식사 시간이 될 것이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산 자들은 먹어야 했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었다.
그때 스님이 도착했다. 회색 승복에 장삽을 든 모습이었다. 빈소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줬다. 스님은 관 앞에 서서 합장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독경을 시작했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목탁 소리가 독경에 스며들었다. 똑—똑—똑. 나무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시간을 쪼개는 소리. 그 울림이 가슴께를 흔들었다. 일정한 간격의 소리였다. 그 소리가 사람들의 호흡을 하나로 모았다. 모두가 같은 리듬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현진은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목탁 소리가 묘하게 키보드 소리와 겹쳤다. 타닥, 타닥, 타닥. 코드를 짜며 내는 소리. 데이터를 입력하며 내는 소리. 현대의 주술사인 프로그래머가 만드는 리듬이었다.
그 리듬 속에서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현진이 창조신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던 날들이었다.
- 패턴이 나왔어요.
현진이 모니터를 돌렸다.
네트워크 그래프. 얽힌 선들이 신화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 한국 창세가가 시베리아와 가장 가깝네요.
박재원이 화면에 기댔다.
- 문화 전파 경로?
- 그런데,
현진이 그래프를 확대했다.
-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독립 발생인데 구조가 같아요.
이수진이 팔짱을 꼈다.
- 집단무의식?
- 아니면...
로시가 말을 멈췄다.
침묵. 데이터가 암시하는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말로 꺼내기는 조심스러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