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흙의 기억: 2

흙과 향 사이

by jeromeNa
이 작품은 고고학적,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는 무관합니다.


빈소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영정이 눈에 들어왔다. 고인의 영정이 상 위에 놓였고, 흰 국화가 그 양옆을 빙 둘러 채웠다. 꽃들이 너무 많아서 영정이 꽃의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사진 속 얼굴은 온화했다.


큰아버지의 사촌형, 호칭으로는 당숙이었다. 구십삼 세.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쳐 이 땅에서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온 분이었다. 주름 하나하나가 역사의 흔적 같았다. 깊게 팬 이마 주름은 뙤약볕 아래 논을 갈던 시간을, 눈가 주름은 수확의 기쁨과 흉년의 슬픔을 동시에 품고 있을 것 같았다.


상주들이 검은 상복 위로 흰 완장을 두르고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큰아들의 눈두덩이 붓어 있었고, 붉은 실핏줄이 선명했다. 며느리는 손수건을 쥐고 있었는데,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 손자들은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도시에서 자란 그들에게 이런 전통 장례는 낯설 터였다. 스마트폰도 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그들의 어색함이 보였다. 도시의 속도에 익숙한 몸이 시골 장례의 느림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지만 그 지루함도, 그 멈춤도 애도의 형식이다. 시간을 견디는 일 자체가.


현진은 상 앞으로 나아갔다. 향을 집어 들었다. 가는 막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촛불에 댔다. 작은 불꽃이 향 끝으로 옮겨 붙었다. 잠시 타오르다가 꺼지고, 붉은 점만 남았다. 그 점에서 연기가 가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향로에 꽂고 두 번 절했다. 무릎을 꿇는 순간, 마루가 삐걱 소리를 냈다. 오래된 나무 마루였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깊이 숙였다. 그 자세에서 잠시 멈췄다. 고인을 위한 짧은 묵념이었다.


일어서자 영정 속 눈과 마주쳤다.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찍은 사진이었다. 그래서 어느 각도에서 봐도 시선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살아생전 말수가 적었다던 분이었다. 사진 속에서도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하지만 눈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 떠나는 것에 대한 담담함, 남겨진 이들에 대한 걱정. 그 모든 것이 눈동자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 먼 길 와줘서 고맙네.


상주가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었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를 닮은 손이었다. 손바닥이 두껍고 단단했다. 마치 나무껍질 같았다. 현진은 그 손을 잡으며 자신의 손을 의식했다. 키보드와 마우스에 최적화된 부드러운 손. 같은 한국 남자의 손이지만, 살아온 삶이 이렇게 다르게 새겨져 있었다.


그 손의 감촉이—문득 다른 감촉을 불러왔다.


며칠 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 차가운 마우스의 플라스틱 표면과 모니터의 푸른빛.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토우가 화면에 떠오르던 순간. 흙으로 빚은 작은 사람 형상. 높이 10센티미터 남짓한 소박한 인형이었지만, 천년의 시간을 견뎌낸 것이었다.


역사학자 박재원이 어깨너머로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 토우... 순장의 대체물.

- 흙으로 사람을 만든다는 발상이 흥미롭죠.


고고학자 이수진이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 삼국유사에도 나와요.


현진은 마우스로 토우를 회전시켰다. 단순한 얼굴. 하지만 천년 전 누군가의 손끝이 거기 있었다.


- 한국 창세가도 그래요.


이탈리아에서 온 암호학자인 로시가 노트북 화면을 보였다.


- 미륵이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고.


화면에 띄운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 미륵님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그 속에 숨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되었다... 여기도 흙이네요.

- 제주도 신화도 비슷해요.


이수진이 말했다.


- 마고할미가 흙을 퍼서 산을 만들고, 흙이 새어나가 작은 오름들이 되었다는. 창조의 재료가 늘 흙이에요.


박재원이 다른 파일을 열었다.


- 그런데 이게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게 더 신기해요. 중국 여와 신화도 그렇고...


화면에는 중국 한대 화상석의 이미지가 떴다. 뱀의 몸을 가진 여와가 진흙을 빚는 모습이었다.


- 여와가 황하의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죠.


현진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 메소포타미아도 마찬가지죠. 대영박물관에서 보낸 길가메시 서사시 데이터 봤어요. 여신 아루루가 진흙으로 엔키두를 만들었다고.

- 이집트의 크눔 신도.


이수진이 태블릿으로 이미지를 보여줬다.


- 도공의 물레에서 사람을 빚는 숫양머리 신이에요.

-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히브리 창세기의 아담...


로시가 손가락을 꼽았다.


- 모두 흙에서 시작해요.


현진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신라 토우의 단순한 얼굴이 묘하게 현대적으로 보였다. 천년 전 신라인도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그들도 같은 대답을 했다. 흙에서 왔다고.


왜 모든 문명이 같은 답을 내놓았을까. 지리적으로 떨어진, 시대도 다른 문명들이 왜 하나같이 흙을 말하는가. 단순히 흙이 가장 흔한 재료여서? 아니면 도자기를 빚는 경험에서 나온 은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었다.


- 패턴 분석 돌려볼까요?


현진이 제안했다.


- 각 문명의 창조신화 텍스트를 모아서 공통 요소를 추출하면...

- 좋은 생각이에요.


박재원이 동의했다.


- 단순 번역이 아니라 의미소 단위로 분석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거예요.


현진은 새 프로젝트 폴더를 만들었다. '창조신화_진흙_패턴분석'. 한국의 창세가부터 시작해서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 그리스, 인도, 중국까지. 모든 텍스트를 모아 AI로 분석할 계획이었다.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면, 기계가 찾아낼 것이다.


의식이 현재로 돌아왔다. 아니, 애초에 떠난 적이 없었는지도. 시간은 늘 겹쳐 있다. 영정 아래 위패의 한자가 선명했다. 한자로 쓰인 이름과 본관. '유인 경주 김공 휘 ○○지구'. 한 사람의 삶이 이 몇 글자로 압축되어 있었다. 신라 토우처럼, 최소한의 형태. 덜어낼 수 있는 것을 모두 덜어낸 자리에 남는 것. 그것이 본질일까, 아니면 또 다른 환영일까.


부엌 쪽에서 된장국 끓는 냄새가 올라왔다. 마을 부녀회 아주머니들이 그릇을 나르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물 끓는 소리, 무언가 써는 소리. 죽음의 공간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 입관 시간입니다.


염사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한가운데 공간이 비워지고, 오동나무 관이 들어왔다. 표면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나뭇결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염을 마친 고인의 몸이 이미 관 안에 모셔져 있었다. 수의가 단정하게 입혀져 있었고, 얼굴은 평온했다. 상주가 떨리는 손으로 명정을 들어 올렸다. 붉은 비단에 검은 글씨. 명정이 관 위에 덮이자, 방 안 여기저기서 낮은 흐느낌이 들렸다.


관 뚜껑이 천천히 닫혔다. 목재와 목재가 맞물리는 둔탁한 소리. 그 소리가 최종성을 알렸다. 은정을 박는 소리가 이어졌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의 망치질이 시간을 못 박는 것 같았다.


현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연구실의 3D 프린터 소리를 떠올렸다. 층층이 쌓이는 플라스틱 필라멘트의 진동. 신라 토우의 복제본을 출력하던 날의 일이었다. 천년 전의 흙 인형이 플라스틱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재료는 달라도 형태는 같았다. 인간을 복제하려는 충동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일까.


상주가 자리로 돌아갔다. 조문객들도 다시 앉았다. 누군가 향을 더 피웠다.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서서히, 형체를 잃으며. 흩어지는 것들은 모두 이런 모양이다. 향연도, 영혼도, 시간도.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기억도. 층층이 쌓였다가 흩어지는, 흙과 연기 사이 어딘가의 존재들.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