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흙의 기억: 1

흙과 향 사이

by jeromeNa
이 작품은 고고학적,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는 무관합니다.


"닌투는 진흙을 자신의 손으로 반죽했다. 그녀는 그것을 14개의 조각으로 나누었다. 7개는 오른쪽에, 7개는 왼쪽에 두었다. 그들 사이에 벽돌을 놓았다."

— 『아트라하시스』, 고대 바빌론, 기원전 17세기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가 읍내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었다. 논둑길 양옆으로 마른 억새가 바람에 쓸렸고, 은빛 물결처럼 일렁였다. 멀리 야산 능선이 겨울 하늘에 낮게 걸려 있었고, 그 위로 희끗한 구름이 느리게 흘렀다. 현진은 속도를 줄였다. 도시의 직선 도로에 익숙해진 몸이 시골길의 굽이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길가 전신주에는 상가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검은 글씨가 흰 천 위에서 춤을 추듯 흔들렸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가 보였다.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느티나무였다. 겨울이라 잎은 모두 떨어졌지만, 굵은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아래 벤치에는 노인 몇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지나가는 차를 따라왔다. 누구네 집 조문객이 또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현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차창 너머로였지만, 예의는 지켜야 했다.


마을회관은 언덕 중턱에 있었다.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길이 가팔랐다. 타이어가 자갈을 밟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미 차들이 빼곡했다. 경운기와 트럭들 사이, 1톤 탑차와 승용차가 뒤섞여 있었다. 번호판의 지역명이 제각각이었다. 서울, 대전, 부산. 전국에서 모여든 조문객들이었다. 현진은 비좁은 공간에 겨우 차를 끼워 넣었다. 사이드미러를 접어야 할 정도로 좁았다.


엔진을 끄자 갑작스러운 정적이 차 안을 채웠다. 서울의 소음에 익숙해진 귀가 시골의 고요함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가 멈췄다. 바람이 차체를 스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현진은 백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며칠째 제대로 못 잔 탓에 눈 밑이 거뭇했다. 토우 복원 프로젝트 마감이 겹쳐 연구실에서 밤을 새운 날들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찬 공기가 폐를 찔렀다. 날카롭고 깨끗한 공기였다. 도시의 미세먼지에 익숙해진 폐가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코끝이 시렸다. 발밑의 땅이 살짝 얼었다가 녹은 상태였다.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었고, 그 안에 하늘이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흙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겨울 흙 특유의 냄새였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부풀어 오른 흙의 냄새. 거기에 섞여 있는 마른풀 냄새, 썩은 낙엽 냄새. 현진은 검은 구두 밑창으로 흙을 한 번 꾹 눌러보았다. 땅은 생각보다 말랑했고, 숨을 쉬는 것처럼 아주 느리고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발을 떼자 구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위로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오고 가는 궤적이 진흙 위에 임시로 새겨졌다가, 다음 발걸음에 지워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흔적처럼, 남았다가 사라지는.


회관 건물은 70년대에 지어진 것 같았다. 시멘트 벽에 페인트를 덧칠한 흔적이 겹겹이 보였다. 초록색 위에 베이지색, 그 위에 다시 연한 노란색. 세월의 층위가 페인트 갈라진 틈 사이로 드러나 있었다. 입구 위에는 '○○마을회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입구에서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한복을 입고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모습이었다. 얼굴이 찬바람에 붉어져 있었고, 눈가에는 울음의 흔적이 말라 있었다.


- 현진이 왔구나.


짧은 인사였다.


- 서울서 오느라 고생했다.


큰어머니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밤새 곡을 했을 것이다. 현진은 고개를 숙였다. 죽음 앞에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현관에는 검은 고무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조문객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현진은 구두를 벗고 고무신으로 갈아 신었다. 차가운 고무가 발을 감쌌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신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도 이런 고무신을 신고 마당을 뛰어다녔다. 지금은 그 할머니도, 그 집도 없다. 사라진 것들의 목록은 늘어만 간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향 냄새가 공기를 바꿨다. 눈이 시큰해졌다. 백단향 특유의 무거운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다가, 서서히 익숙해졌다. 몸이 그 냄새에 적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형광등이 켜져 있었지만, 빛이 충분하지 않았다. 벽에는 마을 행사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운동회, 경로잔치, 마을 총회. 빛바랜 시간들이 액자 안에 갇혀 있었다. 멈춘 듯하면서도, 어딘가로 흘러가는.


복도 한쪽에는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구두, 운동화, 등산화. 각자의 삶의 흔적이 신발에 묻어 있었다. 어떤 구두는 반들반들 닦여 있었고, 어떤 운동화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벽에는 검은 글씨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삼가 故人의 冥福을 빕니다.' 정형화된 문구였지만, 그 정형성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 혼돈스러운 감정을 다잡아주는 형식의 힘이었다.


빈소는 회관 큰방을 막아 마련되어 있었다. 입구에 검은 휘장이 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현진은 잠시 멈춰 섰다. 안으로 들어가면 죽음과 대면해야 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왔다. 돌아갈 수는 없었다.


휘장을 들어 올리는 순간, 향 냄새가 더 짙어졌다. 그 냄새 속에 다른 냄새들이 섞여 있었다. 국화 향기, 촛농 타는 냄새, 사람들의 체취. 그리고 그 모든 것 아래 깔린, 설명하기 어려운 죽음의 냄새. 그것은 냄새라기보다는 어떤 무거움에 가까웠다. 공기 자체가 가라앉은 듯한,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그 무거움이—문득 다른 시간을 불러왔다.


며칠 전, 국립박물관 자료동 지하. 보존실의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던 기억. 스캐너 유리 너머로 보이던 신라 토우의 거친 표면. 천 년의 시간이 새겨진 그 흙의 결. 누군가의 손끝이 빚었을 작은 인형, 높이 십 센티미터 남짓한 소박한 형상. 눈은 손가락으로 꾹 눌러 만들고, 입은 막대기로 그어 표현한 단순함. 그런데도 분명히 사람이었다. 죽은 것들을 보관하는 공간 특유의 정적이, 지금 이 빈소의 공기와 겹쳐졌다. 시간은 늘 이렇게 엇갈리며 스며든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