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때로 영화 보다 더 영화 같다
어느 화요일이었다 우리 병원 환자 대기실 블라인드가 고장이 났다. 아침마다 직원들 중에 먼저 도착 한 사람이 병원 문을 열고 각 진료실의 컴퓨터를 켠 후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환자 대기실을 환기시키고 짙게 드리워진 블라인드를 걷어 내는 일이다.
독일의 병원이나 공공 기관에는 커튼 대신 블라인드를 사용하는 곳들이 많다.
관리하기가 수월하고 햇빛이 강한 여름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아 주고 추운 겨울 외풍을 막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병원 알루미늄 블라인드는 무게도 만만치 않고 살짝 누르거나 터치하면 주르륵 올라가는 요즘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이라 그야말로 힘이 필요하다.
옛날 옛적 영화에서 왜 커다란 배를 망망대해에 띄울 때 돛을 올려라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은가?
그러면 누군가 죽기 살기로 열라리 줄을 당기는 장면이 나온다 딱 고로코롬 생겼다.
아침 굶고 줄 당기려면 현기증 일으키기 딱 좋은 블라인드지만 평소 튼실하고 반듯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출근하는 길에 병원문을 열다 무심코 보니 환자대기실 창문에 드리워져 있던 블라인드 위쪽이 눈에 확 띄게 가장자리가 옆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먼저 출근한 직원들에게 물으니 제일 먼저 출근한 GL이 대기실 블라인드 끈을 잡고 올리 려는데 무언가 우두득하는 소리가 나더란다
기괴한 소리라 혹시라도 고장이 날까 염려되어 더 이상 당기지 않았는데 곧이어 또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밖에서 보기에도 안에서 보기에도 명확하게 씰구러져 버렸다고 했다.
그대로 두기엔 환자 대기실이 너무 암흑의 세계라 급하게 블라인드 회사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오전 안에 기술자를 파견해 준다고 해서 안심하고 일을 했다.
생각 보다 일찍 와준 기술자 아저씨는 고장 난 부분을 체크하고 블라인드 위쪽 부분과 줄을 새로 갈아야 한다고 했다
아저씨는 일단 필요한 재료를 주문하고 다시 와서 수리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수리가 가능하다는 것에 안도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사가 꽤 커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 병원의 건물주님께서는 뭐든 제때 고쳐 주는 예가 없다 해서 만약 공사가
커진 다면 언제 고쳐질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우리의 건물 주님 이야기는 꺼냈다 하면 삼박사일 잡아야 하므로 다음번에 하는 걸로…)
기술자 아저씨에게 견적서를 건물주에게 보내야 하므로 상세한 견적서를 우편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상황을 일단락한 나를 붙들고 기술자 아저씨는 "0000을 알죠?" 라며 "어쩌면 이런 일이 다 있는지 모르겠어요" 며 한참이나 우리 병원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기술자 아저씨는 우리 병원 환자 이자 오늘 주인공의 친구 다.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병만큼이나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극과 극의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크게 생각하고 하루가 멀다 하게 병원에 와서 의사에게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되는 소위 건강염려증 쪽이 있고 병원 오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차일피일 미루며 버티고 버티다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마지못해 병원을 찾는 병원기피증 쪽이 있다.
그 환자는 후자 쪽이었다 병원에 일 년 가야 한번 올까 말까 하던 환자는 이번엔 감기가 유난히 길게 간다며 기침이 심하다고 병원을 찾았다.
그 환자는 피검사 수치도 좋지 않았고 초음파 검사를 하던 우리 병원 원장선생님은
환자를 급하게 대학병원으로 보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환자를 우리는 폐렴이 심해진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대학병원의 퇴원 편지를 들고 그 환자가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그 환자는 어째 그전날 보다 더 초췌해 있었다.
그 이유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던 환자는 MRI를 찍었고 거기서 모양이 암처럼 보인 다는 의사들의 소견이 나왔다고 했다.
조직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 며칠 뒤가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식이라고 했다.
환자는 우선 딸의 결혼식을 위해 일단 퇴원했다가 결혼식이 끝나면 조직 검사도 하고 그다음 항암을 하던 뭘 하던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내일모레 경사를 앞두고 있는 환자에게 축하한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렇다고 MRI에서 암처럼 보인다는데.. 괜찮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해야 할지.. 할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환자는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환자는 평소에 건강했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어느 날 감기가 길게 가서 동네 병원인 우리 병원에 내원했을 뿐이고 염증이 심해져서 물이 차 보인다는 소견으로 대학병원을 갔을 뿐이다.
그 맥락 어디에도 사실 암까지 염두에 두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환자는 사랑하는 딸의 결혼식을 며칠 앞둔 한 아버지다.
온 가족이 충격에 빠진 것은 말할 나위 없을 테고.. 우리도 환자가 안쓰럽고 걱정스러워 착잡했다.
암중에서도 폐암은 예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고 MRI에서 크게 보일 정도면 말기에
가까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지나 환자는 아주 환한 얼굴이 되어 다시 병원을 찾았다.
딸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조직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암이 아니었단다.
조직검사 결과지를 마치 졸업장이나 상장을 받은 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들고 온
환자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매일매일을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시간들이라 생각하고 너무나 소중하게 보냈다고 한다.
우리도 그제야 박수를 치며 따님의 결혼에 대해 마음껏 축하를 해줄 수 있었다.
그날 블라인드 때문에 우리 병원에 들렀던 기술자 아저씨는 그 환자의 친구였다.
그 환자를 대학 병원에 데려다주는 것부터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이었던 거다.
아저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쩌면 이런 일이 다 있는지 몰라요 지난 3주 동안 그 친구와 가족들은 정말 지옥과 천당을 오갔어요 롤러 코스트가 따로 없었죠"
그리고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기적 같은 일 아닙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동안 친구를 잘 진료해 주고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친구분이 그동안 맘고생 많이 하셨겠지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면 좋겠어요"
삶은 정말이지 때로 영화 보다 더 영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