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의 문짝
“너 가면 깜짝 놀랄지도 몰라 “라고 남편이
말했다
우리가 다니고 있는 헬스장에 임시로 만들어진 탈의실을 두고 한 말이다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을 맞아 핼스장은 내부수리를 시작했다.
지난달은 남자들의 탈의실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여자 탈의실 차례.
오랜 전 만들어진 헬스장 탈의실은 캐비닛 색도 몇십 년 그대로의 짙은 나무색을 유지하고 있어
세월이 멈춘 듯 보인다.
클래식하고 아날로그 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가끔 작동이 되지 않는 캐비닛들이 있었다.
캐비닛은 열쇠가 아니라 각자 가지고 다니는 회원용 카드를 들이 대서
열고 닫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가령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겉옷과 가방 신발들을 들여놓고 잠글 때는 분명 잘 되던
문이 왜인지 운동 끝나고 샤워를 하려고 캐비닛문을 열 때는 도통 열리지 않아
실랑이를 하고는 했다.
그나마 운동복을 입고 있던 때는 괜찮은데 샤워하고 나서 옷 입으려고 캐비닛 문을 여는데
안 열릴 때는 정말 난감했다
그 차림으로 입구까지 나가서 직원을 불러올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탈의실 들어가면 그 캐비닛은 열고 닫고 가 잘 되는지 안되는지 확인하는 것이
언제나 급선무였다.
캐비닛은 개인 전용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갈 때마다 다른 곳을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나 저기나 똑같이 생겼고 숫자가 작게 써져 있어서 아까 어디다 넣었더라?
할 때도 많다.
갱년기 건망증이 날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나를 비롯한 아줌마들 뿐만 아니라 젊디 젊은 처자들도 카드를 들고 여기 기웃 저 기기웃 하며 "내가 아까 어디다 넣었지?" 하며 낑낑 대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마치 지하주차장에 어디다 차를 주차했는지 생각이 안 나서 자동차 키 들고 여기저기 누르고 다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탈의실에 들어가 보니 남편이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임시로 사용해야 할 탈의실은 그야말로 서프라이즈였다.
새로이 단장하고 캐비닛 들까지 싹 바꿔 주겠다는데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뭐 하나 공사 들어가면 시간이 참 많이 걸리는 편이다.
한 달...
누군가는 탈의실 하나 바꾸는데 한 달 들여 한다고 하니 그 정도면 빠른 것이라
반가워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이용해야 할 대체 탈의실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는 했다.
한달간 임시로 사용해야 할 탈의실은 평소 우리가 좋아하던 공간
스트레칭 룸 되겠다.
공간의 크기가 몇 사람 스트레칭 하기에는 적당하나 여러 사람이
옷을 갈아 입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탈의실 가운데 떡하니 놓여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바로...
오 마이 가뜨!
한가운데 덩그러니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 문으로 되어 있는
조립식 샤워 부스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마치 건축자재 상가에 전시되어 있는 세트 같기도 하고 하우스 박람회나
모델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는 것 같은 사용한적 없어 보이는 샤워부스였다.
순간 "여기서 홀랑 벗고 샤워를 하라고?"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같은 여자들끼리 라지만 공중목욕탕도 아니고
남들 옷 갈아입는 동안 혼자 훌훌 벗고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탈의실 한가운데서 실시간으로 씻으란 말인가?
남녀 혼합사우나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 동네 정서상 그게 그리 대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훌훌 벗고 남들이 있거나 말거나 잘 보이거나 말거나 씻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여전히 한국 정서가 가득한 나는
요 딴것에 아직 적응이 잘 안 된다.
다행히 샤워하고 갈아입을 속옷은 항상 여벌로 가지고 다니니
운동하고 나서 갈아입고 겉옷 걸치면 그래도 땀흘린후 최소한의 꿉꿉함은
면할 듯싶었다. 샤워는 집에 가서 하는 걸로~!
그런데 탈의실의 서프라이즈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출입문은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일 유리문으로 되어 있던 것을 임시방편으로 가린다고 가린 것이
너덜너덜한 비닐 종이로 반조금 넘게 가려 두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들도 우리의 다리 정도는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뭐 그쯤이야 학교 다닐 때 체육복 갈아입던 실력?으로 카버가 가능하다.
긴치마를 입고 있으니 그 안에서 갈아입으면 보일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들어오거니 나가거니 해야 해서
수시로 열리는 출입문과 맞서며 갈아입어야 할 운동복 상의 였다.
아무리 기본 속옷은 입고 있다지만 속옷차림으로 반쯤 가려진 언제 열릴지 모르는
출입문 앞에 서서 훌러덩 벗고 갈아입기가 고민스러웠다.
그렇다고 한눈에 들어오는 코딱지만 한 탈의실 안은 어느 구석도 안전? 한 곳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캐비닛문을 활짝 열어 가림막처럼 꺾어 두고 그 작은 문짝을 의지해
대가리만 가리고 숨은 닭처럼 가려질 리 없는 몸뚱이를 밀어 넣고 속전속결로 갈아입었다.
바람 같은 속도로 말이다.
하~됐다 하는 낮은 한숨을 쉬고 돌아 서렸는데 내 옆뒤쪽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독일 아줌마가
'뭐 볼것도 없구만 가지 가지 한다!'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얀색 면바지에 파란색 니트를 받쳐 입고 찰랑찰랑한 짧은 갈색의 곱슬머리를
옆으로 흔들며 코끝에 걸린 안경을 끌어 올리고 섰던 중년의 아줌마는
딱 보기에도 나 쫌 잘란 듯! 하는 포스로 취미가 남참견이고 특기가 잘난 척 인 부류
로 보였다.
내 오른쪽 캐비닛이 비어서 그곳을 사용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웬 기골이 장대한 아줌마가 캐비닛 문을 있는 대로 열어 두고 그 문짝 안으로
기어들어 갈 것 같은 기세로 껌처럼 붙어서서는 옷 갈아입는다고
푸드덕 거리는 것이 유난이다 싶었나 보다
사람은 때로는 표정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녀의 그 거시기한 표정에 "왜? 뭐? 어쩌라고? 그래, 니 똥 칼라다!?"
하는 눈빛을 차곡차곡 담아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내 싸나운 눈빛이 부담스러웠던지 아줌마는 얼른 시선을 치우고 옷을
훌러덩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웬 얌전하게 생긴 처자가 가방을 둘러메며 그 가열차게 벋고 있던 아줌마에게 물었다
"저기, 제가 지금 나가도 될까요?"
그 친절한 젊은 처자는 혹시라도 지가 나갈 때 문을 열게 되면 그사이 훌러덩 벗은 아주머니가 곤란할 까봐 물었던 거였다.
그러자 속옷만 남겨둔 아줌마는 큰 목소리로 떠들어 대듯 이야기했다
"아유 그럼요 괜찮아요 누가 우리한테 관심을 갖는다구요!"
마치 내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씨불이는 아줌마의 말에 빡쳐서 눈싸움 2차전에 돌입하려는데…
젊은 처자가 "네~그럼!" 하고 출입문을 씩씩하게 열었고..
문 밖으로 빠져나간 처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운동복 차림의 한 무더기
남정네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짝은 회전문도 아닌 것이 슬로비디오처럼 뚝뚝 끊기는 소리를 내며 닫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염없이 열려 있던 문틈 사이로 지나가던 관람객? 들 눈에는 용감하게 헐벗은 독일 아줌마의
살색 뒤태와 옆태가 가감 없이 전송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가 사용 중인 임시 탈의실 예전 스트레칭룸은 러닝머신 등의 유산소 운동을
하려면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자 남자 탈의실로 들어가는 입구 다.
그렇다 보니 오가는 사람들 특히나 남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몇몇은 못 볼걸 봤다는 눈으로 얼굴을 돌리며 빠르게 지나갔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깜놀 한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갈무리하고 잘난 척하며 떠들다 쪼그라든 용감한 아줌마의
뒤태에 대고 들으라는 듯 한마디 하며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어머 오늘따라 사람들 겁나 많다!"
그때 까지도 닫히지 않던 반전의 문짝 사이로 당황한 듯 허둥대는 용감한 아줌마의 수습중인
반반의 뒤태가 보였고 나는 심술보 가득한 웃음을 해피하게 날렸다.
한번 열리면 잘 닫히지 않는 반전의 문짝 때문에 하루종일 비슷한 문제들이 터졌던지..
다음날 임시 여자 탈의실 문짝에는 전날 생물학적 기호로만 여자 탈의실임을 알리던 것보다
훨씬 큰 글씨가 빨갛게 여기저기 도배되어 있었다.
그 빨간 글씨들은 흡사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여자! 여자! 탈의실이라고! 제발 가까이 지나다니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