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영화 "1987"을 개봉했을 때 극장에 가서 두 번을 보았다.
한 번은 나와 내 친구, 선배, 후배, 동시대인들의 이야기여서,
또 한 번은 마지막 장면에 울려 퍼지는 이한열 합창단의 "그날이 오면"을 한번 더 듣기 위해서였다.
영화가 끝나면서 극장 가득 울려 퍼지던 노래 "그날이 오면"을 들으며 어둠 속에서 꺽꺽 소리가 날만큼 눈물을 흘렸다.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숨죽이며 두려움과 떨리는 가슴을 안고 뛰던 거리에서나 부를 수 있었던 이 노래를 이렇게 극장에서 들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이한열 합창단의 인터뷰는 내 이야기처럼 들렸다.
시대를 함께 했던 이들이 아픔과 슬픔으로 연대하는 벅찬 순간이었다.
그날로부터 33년이 흘렀다.
그러나 1987년의 그날들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교문 앞에서 사복경찰들이 책가방 검사를 해서 소위 불온서적(역사란 무엇인가... 이것도 불온 서적이었다)이 나오면 압수당하고 끌려갔던 시절 이었다.
학교 교문 앞에서 시위를 하다 도망쳐 오면 전경 들이 도서관까지 쫒아와서 최루탄을 쏘던 때. 그래서 학교 도서관 커다란 쇠기둥에 선명히 남아있던 자국.
1987년 1월
그 당시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신문 사회면에 아주 조그마하게 서울대생이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쇼크로 사망했다고 나왔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기사도 나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기사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5배 정도 커진 기사가 나왔다. 얼마 후 1면 톱기사가 되어 신문을 온통 뒤덮었다.
그렇게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23살 청년 박종철은 잔혹한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허무하지만 절실한 구호를 우리는 목이 메이게 외치고 또 외쳤다.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는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무시하는 발표였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가 아니라 대통령 선거인단이 선출하고 국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독재 헌법에 근거하는 내용들이었다.
비난 성명과 시위가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시민들의 전폭적인 참여와 지지를 받으며 시위는 확산되었다.
학교에서 연합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교문 앞에서 시위를 했다. 구호를 외치고 드러눕고 앉기를 반복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교문밖에서 우리를 막고 있던 전경들과 대치하다가 어느 순간 페퍼포그가 진입하고 최루탄을 마구 쏘기 시작했다. 사복들도 사과탄을 던지며 뛰어들어왔다.
우리는 서로 팔을 걸고 누워있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최루가스는 자욱해서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고 모두들 뛰어 달아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도망치다가 넘어졌는데 사과탄이 내 등 위쪽에서 터졌다. 아팠지만 전경에게 잡힐까 봐 참고 비척 비척 걸어갔다.
희미하게 뛰어오는 사복 경찰들을 보고 이제 곧 잡히겠구나 하는 절망적 심정이 되었는데 갑자기 학교 앞 만화가게 셧터 문이 열리더니 나를 확 잡아끌어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화가게 안에는 벌써 여러 명의 학생들이 최루 가스에 눈을 뜨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만화가게 주인이 물도 주고 하며 돌봐 주었다.
나도 한참을 누워 있다가 밖이 잠잠해져서 나오니 거리는 난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라진 나를 찾느라 선배들도 난리가 아니었다. 근데 내 머릿속도 난리가 아니었다. 최루가스가 머리를 하얗게 덮어서 나중에는 머릿속이 헐어 버렸었다. 한참 고생을 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무 말 안하셨다. 우리 집이 서울대 농대 앞이어서 학생들의 격렬한 모습을 모두 보셔서 그랬는지...
그 한 장의 사진으로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아프게 새겨진 이한열, 사람을 향해 직접 쏘면 안 되는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충격은 컸다.
6월 10일, 우리 모두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박. 종. 철. 을. 살. 려. 내. 라!” "이. 한. 열. 을. 살. 려. 내. 라!” "호. 헌. 철. 폐!” "독. 재. 타. 도!” "민. 주. 쟁. 취!”
걸음걸음에 구호를 한자씩 한자씩 새기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날은 학교를 벗어나 중심가 사거리까지 진출을 했다.
우리가 밀고 나와도 이상하게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 최루탄이 떨어졌다는 소리도 들렸다. 전국에서 엄청난 시위가 계속 벌어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자신만만하게 계속 밀고 나갔다.
그리고 신이 나서 화염병도 벽돌도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평화시위 비슷하게 구호만 외쳤지 우리는 무방비였다.
근데 갑자기 전경들이 최루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화가 나서 신고 있던 신발을 마구 던졌다. 그러다가 힘에 부쳐서 맨발로 도망을 쳤다. 나중에 보니 도로 한가운데 신발이 한가득이었다.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우리는 이후 이 일을 "죽 쒀서 개 줬다"고 분통을 터트리며 회고했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때 커다랗게 한발 나아갔고, 승리의 경험은 우리 안에 깊이 새겨졌다.
시간은 흘러 2016년
우리는 다시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였다. “우리가 어떻게 지킨 민주주의인데!" 하면서
2016년 10월부터 시작된 촛불
친구들 모임을 토요일 광화문 광장에서 했고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 상경했다. 도저히 박근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촛불집회는 참으로 놀라웠다.
처음 광화문에 가던 때가 생각난다. 옛날 시위를 생각하며 떨리는 가슴을 안고 전철을 타고 올라가는데 아무리 토요일이라지만 전철 안에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가족들, 내 또래 부부들,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 아저씨들...
내려야 할 전철역에 와서 다시 한번 놀랐다. 전철역에 사람이 꽉 차서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는 모든 출구는 안내에 따라 천천히 나갈 만큼 사람이 많았다. 간간이 구호도 들렸다.
광장으로 나와 보고 정말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눈이 시큰해졌다.
그렇게 많은 날들의 겨울을 광장에서 보냈다.
차가운 광장 바닥에 몇 시간씩 앉아있는 것이 하나도 춥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역을 지나 을지로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그 길은 나의 1987을 상기시켰다. 게다가 시위는 평화적이고 축제에 가까웠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추워도 날이 좋아도 촛불과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
토요일 오후 4시
배낭에 촛불과 1인용 돗자리, 물과 간식, 목도리를 챙겨 버스를 타고 친구와 친한 누군가와 때로는 혼자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내가 다녔던 대학이 나온다. 화염병과 깨진 벽돌, 최루탄이 난무하던 그 두렵고 떨리던 거리를 지나간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것을 믿는다.
저 거리에 서있던 젊은 날의 나는 이제 나이 지긋한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내 아이들과 내 아이들의 아이들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 만한 세상이 되도록 뭐라도 할 것이다.
일상에서 작은 한걸음을 새기듯 내디딜 것이다.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