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
어느 날 출근길에 내가 미워하던 사람을 만났는데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내내 안 좋았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도, 편안한 저녁 산책을 하면서도 옛날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우고 자꾸 화가 났다.
심지어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자괴감과 우울감이 밀려왔다. 지난 일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치미는 상황들이 피를 뚝뚝 흘리며 불면의 시간으로 찾아왔다.
며칠을 끙끙대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뭐하는 짓인가.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일로 나는 현재를 망치고 있다. 스톱! 그만하자!
나는 같은 직장에 이십 년 넘게 다니고 있다.
그만큼 아는 사람도 많지만 불편한 사람도 있다. 불편하다는 것은 서로 마주쳐도 인사를 받지 않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을 정도로 안 좋은 감정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구지어 엄선한다면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서너명 있다.
어느 날,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나와 불편한 사람이 혼자 타고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안탈 수도 없어 보일 듯 말 듯 살짝 목례를 하고 탔다. 습관적으로였는데 내가 목례를 한 게 내내 기분 나빴다.
게다가 코로나로 1층에서 내린 후 체온과 신분증을 확인받고 고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야 했는데 그날따라 신기하게도 1층에서 올라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또다시 둘이 타고 올라가게 생겼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7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그날 나는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배가 살살 아파서 평소에는 지하에서 1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빨리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었다. 7층을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게 올라가서 화장실로 직행했다. 1층에도 화장실이 있었는데...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
이 불편러와 불편하게 된 것은 15년도 넘은 이야기이다.
어느 날 같은 팀 고참 직원의 전화가 울려서 내가 당겨 받았다.
"감사실인데 000 씨 바꿔 주세요"
"지금 자리에 안계신대요"
"멀리 가셨나요?"
"말씀 안 하고 나가셨으니까 요 앞 복도나 화장실에 가신 것 같습니다"
"출장 달고 가셨습니까?"
"잠시 커피 마시러 가거나 화장실 가는데도 출장을 달고 가나요?"
처음 전화 왔을 때부터 말투며 분위기가 고압적이고 기분 나빴다.
"... 전화받으시는 분 직급이 뭡니까?"
"전화하시는 분 직급은 뭐죠?"
"전화받으시는 분 이름이 뭐예요!"
"전화하시는 분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요!"
감정이 격해졌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근무상황부 감사실 팩스로 보내세요!"
"필요하면 직접 와서 가져가세요!"
잠시 후 그 인간이 씩씩대며 뛰쳐 내려왔다. 내 자리를 향해 칠 듯이 오며 화를 냈다.
나는 "감사실이면 다냐. 직원에게 그렇게 불친절해도 되는 거냐. 당신들은 화장실 갈 때도 출장 달고 가냐"라고 맞받아 치며 사무실에서 한바탕 싸웠다.
감정이 격해져서 몸싸움 직전까지 갔는데 친한 직원이 뛰어와서 말리며 그 직원을 떼어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인간은 나보다 직급도 낮고 나이도 한 살 어렸다. 더 분했다.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승진을 해서 부서를 옮겼는데 우리 부서와 내 업무 관련 불만이 감사실에 접수가 된 모양이었다.
부당한 일에 대해 되고 안되고를 확실히 이야기하던 한참 팔팔하던 시절이라(지금은 좀 융통성 있게 하는 편이지만...) 요구하는 게 뜻대로 안 된 누군가가 감사실에 불만을 넣은 것이다.
근데 어이없게도 본인과 상관도 없는 옆팀 일이었는데 그 불편러가 구지어 우리 부서까지 와서 나에게 훈계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꼭지가 휘리릭 돌았다. "일이 없으신가 보네요. 옆팀 일까지 관여하고!" 나의 공격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쏘아보더니 돌아갔다.
그 후, 우연히 마주치면 그 불편러는 아는 척을 할까 말까 하며 화해를 하고 싶어 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 받아주지 않고 안면 몰수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조직 안에서 많은 욕을 먹던 그 불편러는 기회를 잘 타 나보다 더 승진을 빨리해서 내 윗 직급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친한 직원들과 모임이 있던 날 나는 한잔 마시고 좀 취한 김에 그 불편러와의 엘리베이터 사건을 이야기했다. 모두 엄청 웃었다. 그러고 다음날 문자가 왔다.
"보내버린 거야?"
"???"
알고 보니 인사발령이 났는데 그 불편러가 징계성으로 다른 부서로 날라간 것이었다.
내 능력의 끝은 어디인가!
이제는 어느 날 문득 그 불편러를 만나게 된다면 가볍게 인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초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진짜 하려던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면 내가 너무 찌질하고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괴로움 속에 다시 갇히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말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했지만 겨우 꾸덕해진 상처를 다시 헤집고 싶지는 않다. 최소한 지금은.
언젠가는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안 해도 조용히 잊혀졌으면 좋겠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복수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노자 <도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