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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현 9시간전

할아버지의 사랑

ARS라도 괜찮아!

수험번호 2728 신아현

합격입니다.




우리 집안에는 대학 나온 사람이 없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공부를 안 했던 것 같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곧 잘한 나는 할아버지의 기쁨이고 희망이었다.


고등학교 모의고사에서 불어 100점을 받아 전국 1등이라고 나온 과목 성적표를 보고, 할아버지는 세상에 우리 집안에 어떻게 이런 애가 있냐며 기뻐했다.

100점 받으면 다 전국 1등이라고 말했지만, 할아버지에게 그런 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난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서울대라도 갈 줄 알았지만 사실 택도 없었다. 겨우 부산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원서를 넣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4년제 대학에 입학하는 손주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했다.


드디어 대학 합격 발표 날!

난 합격자 발표 안내 전화에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수험번호 2728 신아현, 합격입니다.'

전화기 너머 ARS가 나의 합격을 알렸다.


나는 이 소리를 할아버지에게 들려드리고 싶어 바로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저 대학에 합격했어요."

"아이구. 그럴 줄 알았다."

할아버지가 직접 듣고 기뻐하실 수 있도록 합격자 발표 안내를 할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할아버지는 전화기에서 여자 음성이 나오자 두 손으로 전화기를 꼭 잡았다.

"수험번호 2728 신아현"

"네네. 맞습니다. 내 손주"

"합격입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꼭 잡은 전화기에 계속 감사 인사를 한 후, 전화기를 놓더니 한번 더 전화해도 되냐고 물었다.

손녀의 합격 소식을 더 듣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 마음을 알기에 또 전화를 걸어주었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공손하게 수화기를 잡고 합격 소식에 연거푸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현아, 내 한 번만 더 합격이라는 소리가 듣고 싶은데, 그 여자가 자꾸 전화한다고 성낼라나?"

할아버지는 ARS 자동 응답 시스템을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 수 백번 전화해도 성 안 내요. 또 전화하세요."

"진짜? 계속 전화해도 성 안내나? 그 아가씨 참 착하네."

그렇게 할아버지는 세 번을 전화해 음성 아가씨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지금도 가끔 할아버지가 공손하게 전화기를 잡고, 합격을 전하는 ARS에게 절하듯 인사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30년 전인 그때, 할아버지는 대학교 등록금을 내주었고, 당시 귀하고 비싼 컴퓨터도 사주었다.

할아버지는 공부 잘한다고 생각한 손녀딸을 무척 사랑했다.


할아버지는 쑥떡을 좋아하셨다.

대학교 때 학교를 일찍 마치면 쑥떡을 사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쇼파에 앉아 손녀가 사 온 쑥떡을 오물오물 씹으며, 나를 쳐다보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런 사랑이, 그런 사랑을 준 할아버지가 몹시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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