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기억, 세 가지 피해의식 I

사실의 기억, 상상의 기억, 사실-상상의 기억


피해의식이 기억의 문제라면, 피해의식에는 세 가지 피해의식이 있다. 앞서 기억에는 ‘사실의 기억’과 ‘상상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억에는 세 가지 기억이 있다. ‘사실의 기억’과 ‘상상의 기억’, 그리고 ‘사실-상상의 기억’이다. 그러니 피해의식 역시 세 가지 종류의 피해의식이 있다.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 ‘사실-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다. 각각의 피해의식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부터 알아보자. ‘선재’는 가난했다. 문제집을 살 돈이 없어서 친구의 문제집을 빌려 연습장에 옮겨 적어야 했고, 보충 수업비를 못 내서 선생의 꾸중을 들어야 했다. 이 모든 기억은 사실이다. 그 ‘사실의 기억’ 때문에 ‘선재’에게는 피해의식이 생겼다. “무조건 돈이야.” ‘선재’는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했고 사랑하는 이에게조차 돈을 쓰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다.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무엇일까? ‘서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가난을 경험한 사실이 없다. 그런데도 항상 돈에 집착했다. ‘서희’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돈 없으면 죽어야 돼.” 이런 일은 왜 발생했을까? 가난했던 사실은 없지만, 가난의 공포에 대한 과도한 상상을 반복함으로써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다.


‘사실-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무엇일까? ‘우진’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집에서 자랐다. ‘우진’은 입고 먹고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족하지 않게 자랐다. 하지만 넉넉하지 않았던 집안 사정 때문에 정작 갖고 싶었던 게임기나 컴퓨터는 갖지 못했다. 그 때문에 ‘우진’은 피해의식이 생겼다. “돈만 많으면 돼.” ‘우진’의 피해의식은 전적으로 ‘상상의 기억’이 만들어낸 피해의식일까? 그렇지 않다. ‘우진’이 게임기와 컴퓨터를 갖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진’의 피해의식은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일까? 그 역시 아니다. ‘우진’의 피해의식은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이 덧대어진 결과이다. ‘우진’은 가난에 대한 ‘사실의 기억’이 있지만, 그 ‘사실의 기억’을 기초로 ‘상상의 기억’을 덧대어 왜곡‧조작‧편집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사실-상상의 기억’이다. 이런 기억으로부터 피해의식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이 ‘사실-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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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밀도 피해의식과 고밀도 피해의식

모든 피해의식은 우리네 삶을 슬픔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모든 피해의식이 같은 강도로 우리를 슬픔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다. 피해의식은 저마다 밀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에는 심각한 피해의식이 있고,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혹은 평범한) 피해의식이 있다. 전자를 고밀도 피해의식, 후자를 저밀도 피해의식이라고 하자. 고밀도 피해의식은 큰 슬픔을, 저밀도의 피해의식은 작은 슬픔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고밀도의 피해의식과 저밀도의 피해의식은 어떻게 다를까?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가장 저밀도이고,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가장 고밀도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피해의식과 기억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자. 피해의식은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이 기억이 작동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그 상처받은 기억이 다른 기억들을 불러내는 것을 막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처받은 기억이 다른 기억을 불러내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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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밀도 피해의식, ‘사실의 기억’


이제 저밀도 피해의식이 ‘사실의 기억’으로부터 촉발되고, 고밀도 피해의식이 ‘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촉발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저밀도 피해의식부터 이야기해보자. 사실과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사실은 다른 사실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사실이 있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해보자. 그때 그 친구와 함께 바닷가에 놀러갔던 사실의 기억이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사실의 기억’은 또 다른 ‘사실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사실의 기억’으로 촉발된 피해의식이 저밀도인 이유다.

‘선재’의 피해의식을 생각해보라. 그의 피해의식은 저밀도이다. ‘선재’의 피해의식은 가난해서 상처받은 ‘사실의 기억’ 때문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선재’의 이 ‘사실의 기억’은 또 다른 ‘사실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선재’는 정신없이 바쁜 출장 중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허름하지만 온기 있는 식당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선재’는 가난했지만 행복하기도 했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그 새로운 ‘사실의 기억’은 선재의 피해의식(“무조건 돈이야.”)이 더 심각해지는 것을 막는다. 가난해서 상처받은 기억도 있지만, 가난했기에 애틋했던 기억마저 갖고 있는 이는 돈 너머의 것들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저밀도일 수밖에 없다. ‘사실의 기억’은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또 다른 ‘사실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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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밀도 피해의식, ‘상상의 기억’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 가장 고밀도인 이유 역시 이제 알 수 있다. 피해받은 ‘사실’이 아니라 ‘상상’이 피해의식을 만들 수도 있다. 이 피해의식은 점점 더 짙어질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런가? 그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다른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상상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기에 그것에 연결된 다른 ‘사실의 기억’이 있을 리가 없다. ‘상상의 기억’은 또 다른 상상을 증폭시킬 뿐이다.

‘서희’의 피해의식을 생각해보라. ‘서희’는 가난했던 사실이 없다. ‘서희’의 가난은 상상 속에만 있다. 그 가난의 상상이 불러일으킬 기억은 또 다른 ‘상상의 기억’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다시 가난의 상상일 가능성이 크다. ‘서희’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사실의 기억’이 떠오르기보다 상상 속 가난의 기억이 떠오르고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마치 귀신 영화(상상)를 보고 겁먹은 아이가 점점 더 무서운 귀신을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상상의 기억’으로 인해 촉발된 피해의식은 보이지 않는 유령을 피해 달아나려는 마음과 같다. 보이지 않는 유령(피해)을 피해 달아나려는 마음(피해의식)은 점점 더 커질 뿐 좀처럼 작아지지 않는다. 상상 속 유령은 보이지 않기에 대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촉발된 피해의식은 고밀도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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