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피해의식, ‘사실-상상의 기억'
실제 우리네 삶에서 ‘선재’와 ‘서희’는 존재할까? 달리 말해, 완전한 ‘사실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와 완전한 ‘상상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는 존재할까?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드물 테다. 전자는 ‘컴퓨터’이고, 후자는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실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컴퓨터’이고, 완전한 ‘상상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정신병’이다. ‘컴퓨터’와 ‘정신병’은 우리네 일상에서 매우 드문 존재들이다.
우리의 기억은 ‘컴퓨터’와 ‘정신병’, 그 사이 어디쯤 있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의 기억’과 ‘상상의 기억’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있는 ‘사실-상상의 기억’이다. 일반적인 피해의식은 ‘사실’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왜곡‧조작‧편집된 ‘상상’의 기억이 더해진 ‘사실-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촉발된다. 누군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시절 가난을 실제로 경험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어느 정도의 상상이 덧대어져 만들어진 경우가 일반적이다.
일반적인 피해의식은 ‘사실-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동일한 피해의식 역시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밀도가 매 순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하는 두 가지 변수(‘사실’과 ‘상상’)가 매 순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사실’과 ‘상상’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피해의식의 두 변수, ‘사실’과 ‘상상’
먼저 ‘사실’부터 이야기해보자.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짓는 변수로서 ‘사실’은 과거의 현실적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거의 현실적 조건(사실)에 따라 피해의식의 밀도는 달라진다. 쉽게 말해,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이들의 피해의식은 상대적으로 고밀도일 가능성이 크고, 평범한 가난을 경험한 이들의 피해의식은 상대적으로 저밀도일 가능성이 크다. 즉, 사실로서의 상처가 깊으면 피해의식이 고밀도일 가능성이 크고, 사실로서의 상처가 얕으면 피해의식이 저밀도일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상상’이다. 과거 같은 크기의 가난(현실적 조건)을 경험했던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둘의 피해의식은 같은 밀도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은 크기의 ‘사실’(상처)을 바탕으로 얼마나 더 ‘상상’(왜곡‧조작‧편집)했느냐에 따라 피해의식의 밀도는 현저히 차이가 난다. 이것이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덜 한 이가 있고, 평범한 가난(어찌 보면 부유했을 법한 조건)을 경험했으면서도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가 존재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의식의 밀도 차를 결정짓는 두 변수(‘사실’과 ‘상상’)는 동등한 위상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보다 ‘상상’이 더 큰 변수다. 엄밀하게 말해, 피해의식에서 ‘사실’이라는 변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불행의 ‘사실’만큼 행복의 ‘사실’ 역시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전적으로 불행한 ‘사실’만으로 구성된 삶도 없고, 전적으로 행복한 ‘사실’만으로 구성된 삶도 없다.
행복의 뒷면에는 언제나 불행이 있고, 불행의 뒷면에는 언제나 행복이 있다. 과거 불행했던 현실적 조건(사실)이 있을 수 있다. 그 ‘사실’(가난)이 피해의식을 촉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피해의식을 완화할 다른 행복의 사실(“작은 단칸방이어서 그때 우리는 참 행복했구나.”) 역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실’은 피해의식을 촉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그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사실’은 피해의식의 밀도 차를 결정짓는 지배적 변수는 아니다.
피해의식의 지배적 변수, ‘상상’
피해의식의 밀도 차를 결정짓는 지배적 변수는 ‘상상’이다. ‘상상’은 ‘사실’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진’의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우진’은 딱히 큰 가난을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넉넉한 살림이 아니어서 게임기와 컴퓨터는 갖지 못했다. 그 ‘사실’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을 촉발하겠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월급날 따뜻한 방안에서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통닭을 먹었던 행복한 ‘사실’ 역시 불러일으킬 테다.
하지만 성인이 된 ‘우진’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즉, 가난에 대한 지독한(고밀도)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바로 ‘상상’ 때문이다. ‘우진’은 게임기와 컴퓨터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과거의 기억을 왜곡‧조작‧편집해서 ‘상상’했다. 이 ‘상상’은 치명적이다. 이 상상이 커져갈 때, ‘우진’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세상 누구보다 가난했고 상처받았던 아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상’은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짓는 지배적 변수다. 바로 여기에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동일한 피해의식의 밀도가 매 순간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우진’은 언제 피해의식이 심해질까?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기억’에 치우치는 만큼 피해의식이 짙어진다. 반면 ‘상상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상상의 기억’을 해체하여 ‘사실의 기억’을 복원하는 만큼 피해의식은 옅어진다. 이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사실-상상의 기억’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이 ‘사실’과 ‘상상’ 사이 어디쯤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피해의식 역시 그 밀도를 달리하게 된다.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우리의 기억을 점검하는 일이다. 우리의 피해의식이 ‘사실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인지, ‘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실-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이지 차분히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피해(상처)받은 기억은 ‘사실’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내가 피해(상처)받은 기억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상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