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각자에게는 모두 제각각의 상황이 있다

연기자가 된 것만 같은 요즘

by 이보소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아기는 동물을 좋아했다.

돌 때는 강아지와 고양이, 참새 등 집 근처 동물 친구들에 환호를 했고 두 돌 때는 사자와 호랑이, 치타, 고릴라 등 육식 동물에 열광을 했다. 동물의 세계는 참으로 다양했는데 세 돌 무렵부터 아기는 웜벳, 테이퍼, 포코투칸, 벌쳐, 오카피 등등 처음 들어본 동물들을 알려줬다.


다양한 동물의 세계 덕에 나 또한 정보의 폭이 넓어졌다. 가령 얼룩말의 몸통은 바탕이 검은색이고 얼룩무늬가 흰색이라는 것과 개미핥기의 혀는 찐득하고 긴 대롱 모양으로 생겨서 땅 속에 혀를 넣어 개미를 먹는다는 사실 같은. 말랑한 인형보다는 딱딱한 피규어가 좋다는 아기의 취향 덕에 피규어는 예쁜 쓰레기라는 불변의 생각이 변하기도 했고 얕게 쌓인 동물 지식으로 피규어를 바라보다 보니 동물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도 다달았다.

덕분라 해야 할까. 하나 둘 동물들을 모아가던 동물 피규어는 이제 백 마리 가까운 동물원 수준으로 번식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아기는 그간 무지했던 세상을 알게 해주기도 하는 존재이다.


세 돌 무렵 깜깜한 영화관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동물 덕분이었는데 그날은 산타할아버지가 한국 에 상륙하던 날이자 라이언킹 실사판 개봉한 날이었다. 팝콘을 우걱 씹으며 관람을 마친 아기는 자신이 '심바'가 되어 때로는 '무파사'가 되어 집 안을 돌아다녔다. 이후 서점에서 발견한 피규어가 있는 라이언킹 책은 한 때 최애 책(관심은 약 일주일로 끝이 났다)이 되었고 킨더조이 나툰즈 한정판(킨더조이 초콜릿도 처음 사 보았다)에서 '심바'를 뽑아달라며 편의점으로 유인하기도 했다. 평소 피규어 모으는 것은 사치라고 규정한 내가 도리어 중독이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는데 자기 객관화가 부족했던 내가 중독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이웃사촌 사랑 당근마켓 나눔 때문이었다.(코끼리 혹은 키위새만 나오는 킨더조이의 상술에 지쳐 있을 때 주위의 은인이 필요한 동물들을 하사해주셨다)


요새의 나와 아기는 동물 상황극 삼매경이다.

이불은 빙하가 되고 아기 침대는 북극이 된다. 서로 펭귄과 북극여우가 되어 남극을 돌아다니다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줄어드는 빙하 때문에 아기는 침대 위로 오르라고 명령한다. 침대 위로 올라가면 바로 정글이 되어 악어와 고릴라로 변하는데 두 마리의 동물들은 갑자기 이불 안으로 쏙 하고 들어가 난데없는 비를 피한다. 이불속은 금세 동굴로 변하고 악어와 고릴라는 동시에 박쥐가 되어 거꾸로 매달렸다가 비가 그치자 다시 동굴 밖으로 떠난다. 시시각각 변하는 동물 놀이가 요새의 숏폼 느낌이지만 동물을 좋아하는 아기 덕에 동물이 되어보니 그들도 꽤 열심히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자에게는 모두 제각각의 상황이 있다.


아기의 동물 사랑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언제까지 아빠와 놀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를 찾을 때까지는 아낌없이 놀아줄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 나중에는 아쉬움으로 남을 테니깐. 아마도 이번 주말의 나는 미어캣이 되고 사막여우가 되고 스컹크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