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의 시간> 14화.
별안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억수같이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열차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소리 같았다. 발밑의 땅이 흔들리고,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번개가 번쩍하더니,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천둥소리가 천지를 가득 채웠다.
"나무를 잡아요! 나무에 단단히 매달려요!"
하지만 근처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폭이 10미터나 되는 그것은 검고 거대해 보였다. 게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미처 판단한 겨를도 없이 그것이 나를 덮쳤다. 물이었다.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내 머리를 뒤덮었다. 갑자기 덮쳐 온 거대한 물속에서 내 몸은 뒤틀리고 맴돌았다.
홍수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끝났다. 파도는 지나갔고, 그 뒤에 남은 물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굵은 빗방울이 내 살갗을 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을 위로 쳐들어, 빗줄기가 내 눈에 묻은 진흙을 씻어내게 했다. 몸을 똑바로 세우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나는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두 다리가 땅에서 2미터쯤 위에 매달려 있었다. 내 몸이 골짜기 중턱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홍수를 겪으면서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그 일로 생긴 긴장이 금방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도,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웃고 있었다. 나 또한 홍수에 몸을 씻은 덕분에 기분이 훨씬 좋아졌고, 겉모습도 전보다 나아졌다.
폭풍우를 겪으며 나는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지, 또한 내가 생명에 얼마나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충격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의 문 앞에 다가섰던 그 경험은, 주변에 있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기쁨이나 절망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무엇인가에 애착을 갖는 것이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내 몸에 걸친 누더기만 빼고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부족 사람들로부터 받은 작은 선물들도 모두 없어졌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손자들에게 주려고 소중하게 간직하던 물건들이었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나는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일을 안타까워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평화로운 마음으로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을 잃은 대가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것은 과연 괜찮은 거래였을까?
내가 물건에 너무 집착하지만 않았더라도 그 기념품들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부족 사람들은 말했다. 신이 보시기에 내가 아직도 물건에 지나친 애착을 갖고 그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주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마침내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소중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그날 밤, 편안한 딩고 가죽도 없이 맨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마음의 평화를 비는 유명한 기도가 내 마음에 떠 올랐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마음과,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바꾸는 용기와,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27. 모든 것이 비에 떠내려가다 (248-252쪽 요약)
<무탄트 메시지> -호주 원주민 '참사람 부족'이 문명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말로 모건 지음 | 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연재브런치북 <삭의 시간>은 침묵에 대한 내용이니만큼 댓글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해보는 것으로 침묵과 말에 대한 실제적인 차이를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 침묵은 고요하고 음악은 시끄러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