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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Aug 31. 2024

엄마의 택배 언박싱 (눈물주의!)

-<사랑의 학교> 2024년 여름, 엄마가 보낸 택배




뭐가 들었는지, 어찌나 무거운지, 허리 다칠까 조심조심 옮겼다.

투명과 노랑, 두 종류의 테이프로 몇 겹이나 꼼꼼하게 둘러친 테이핑은 뜯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뚜껑을 열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장면이 펼쳐졌다.

조그만 틈새에 뭐라도 하나 더 채우려고 부피가 작은 자두나 귤을 끼워 넣은 아이스박스의 모습은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연상시켰다. 팔순의 노모는 각각의 반찬마다 직접 가위로 모서리를 둥글린 쪽지에 철자가 틀린 글씨로 빼곡한 사연을 써서 동봉했다.





브르베리 하루 1숟가락 먹을 것 (알아보셨겠지만 우리 엄마가 쓴 '브르베리'란 '블루베리'를 의미한다.)


 쌀, 석기차지 않게 비닐봉지에 담아 냉장실 보관 2024. 8. 26일 ('석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딸과 함께 한참을 해독했는데, '습기'라는 것을 알아내고 파안대소했다. 엄마는 80 평생 '습기'를 '석기'로 알고 사셨던 걸까?)


∙ 쌀은 여름에는 날파리가 생길 수 있다. 냉장고 보관. 가을, 겨울에는 쌀이 좋고 봄, 여름에는 벌레가 생길 수 있다. 냉장고에 넣고 사용할 것. 앞으로 쌀은 얼마든지 택배 부쳐줄 테니 그리 알고, 잘 챙겨 먹을 것. 2024. 8. 26 김태수 (엄마는 작은 쪽지마다 날짜와 엄마의 이름을 써두셨다.)


∙ 쌈 오이나 풋고추, 나물종류 찍어먹는 막장. 내가 만들었다. 된장, 고추장, 고추가루, 마늘, 꼐, 매실액, 날씨도 덥고 반찬 하기 귀찮을 때, 찍어먹으면 된다. (꿀팁!)


∙ 포도 액키스. 포도 집에서 삶았다. 물 타서 먹을 것. 진하다. 별 것 아니지만 내 성의다. 잘 챙겨 먹어라. 여름 음식은 짜야한다. 2024. 8. 19 김태수


∙ 매실액. 물 1컵에 매실 1스푼 위장, 대장 염증 씻어 내는 역활 한단다. TV에서 방송했다. 하루 1잔 꾸준히 먹으면 좋다. 추석 때 오면 매실액 많이 가져가길. 피요한것 있으면 전화해라. 택배 부쳐줄 테니. 그리 알고. (피요 -> 필요)


∙ 생선 뼈 조심했어 먹을 것 (나는 지금 52살이다.)


∙ 곰국. 입에 맞을런지. 냄비에 부어 끓여서 파, 후추, 소금 넣어서 먹을 것. 곰국, 진하게 끓였다. 조금씩 먹을 것. 숟가락으로 기름 걷어내고 먹을 것. 뼈속에서 나온 기름이라 그냥 먹어도 된다. 냄비 뚜껑 열고. 뚜껑 덥어면 넘칠 수 있다. 따끈하게 했어 먹을 것. 이열치열 곰국. (뭔가 시 같다!)


∙ 내가 쓰던 냄비. 손때 묻은 냄비에 찌게도 해 먹고, 전골도 해 먹고, 고기, 야채도 볶아먹고, 내가 사용하던 냄비 골동품으로 사용해라. 한 번씩 자주 사용한 지가 한 15년 된 것 같다. 가스불에는 큰 냄비 사용이 좋다. 작은 냄비 보다 밑이 큰 냄비에 음식을 하면 불꽃이 끝으로 많이 안 나오고. 생선도 짜작짜작 끓여 먹고. 가스 2단계, 1단계 사용, 3단계는 잘 넘치고 잘 탄다.


∙ 냄비 뚜껑은 다음에 부쳐줄게. 통이 작아서 (시골 장에 다녀오는 마을버스마냥 아이스박스를 어찌나 꽉꽉 채워 넣었던지, 결국 냄비 뚜껑 손님은 탑승하지 못했고, 냄비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 시락국 잘 챙겨 먹어라. 입에 맛이 없어도 몸에 보약이다. 여름 음식.... 시락국 재료. 추탕. 원배기 (번역: 추어탕 원액) 시래기, 된장, 마늘, 파, 고추가루, 방아, 후추, 생강, 맛술, 들꼐, 콩가루, 따끈하게 했어 먹을 것


∙ 김치, 김치, 이것저것 챙겨 보낸다. (김치를 왜 두 번 쓰셨는지 의문인데, 뭔가 생동하는 느낌이다.)


은 냉장에 넣어면 엉고된다. 서널한 곳에 보관. (번역: 엉고 -> 응고 / 서널한  -> 서늘한)


∙ 계란도 삶아서 하루 1알 내지 두 알 먹어라. 머리가 좋아진단다. (제발 그랬으면!)


∙ 포도 깨끗이 씻어 먹어라. 흐르는 물에 잘 씻어라. (이 메모는 뒷면에 써진 것을 나중에 발견했다. 포도가 씻어진 것 같아서 엄마 말씀을 안 듣고 그냥 먹었는데 끄떡없다.)


∙ 부엌세제. 세제 양을 작게 사용. 거품이 많이 난다. 두 방울 사용할 것. 좋은 것 같드라. 7년째 사용한다.




사랑하는 아녜스, 한나 (아녜스 -> 나 / 한나 -> 딸)

날씨도 더운데 물 자주 먹고, 건강조심. 올여름은 유난히 찜통이다. 올해 같이 더운 것은 50년 만에 처음이라고 TV에서 방송했다. 건강 신경 쓰고. 건강이 재산이다. 여름에 속옷도 큼직하게 입는 것이 좋다. (이렇게 큰 여성 속옷도 있나 싶을 만큼 큰 꽃무늬 팬티를 동봉함으로써 여름 속옷의 스캐일을 보여주심. 얼마나 편한지 뱃살이 늘어나는 것 같다. 차마 사진 자료로 공개하기는...)

주희 솜씨 좋다고 승현이가 이야기 하드라. 가방, 주희가 손수 작품했다고. 대단하구나. 예쁘고, 손재주도 좋고. 우리 주희. 누구보다 할머니는 사랑한다. 속 깊은 주희. 시간 나면 자주 전화해 다오. 주희, 사랑한다.

2024. 8. 26일 월요일 KIM (편지 마지막에는 KIM이라고 멋지게 영어로 서명을 하셨다.)





켜켜이 쌓인 반찬을 꺼내며, 일일이 써붙인 메모를 읽으며, 박장대소를 했다가, 눈물을 훔쳤다가를 반복했다. 엄마의 택배 언박싱,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반찬을 다 꺼낼 무렵 아이스박스 구석에서 발견된 성모님과 예수님이었다. 엄마는 내가 예수님을 모를까 봐 그랬는지, 예수님을 강조하려고 그랬는지 의도는 모르겠지만 십자상 아래쪽에 '예수님'이라고 굵은 매직으로 써놓으셨다. 딸은 연신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난다"라고 말하며 추석 때 할머니께 드릴 거라고 뭔가 뜨개질을 시작했다. 

엄마의 음식은 엄마 말씀대로 짰다. 짠 것을 유독 못 먹는 딸은 자기는 "원래 짠 것을 좋아한다"며 적극성을 발휘했다. 팔순 노모께 해드리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받아 먹는다고 욕먹을지 모르지만, 엄마의 기쁨을 받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의 주고 싶은 마음으로 2024년 여름의 우리는 한 뼘 더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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