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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별 Nov 10.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기록#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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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대학을 목표로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면 고민하는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학급 모두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올해 꼭 이뤄내야만 하는 과업으로 여기셨던 선생님과 일 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주변에 대다수의 친구들과 함께 철석같이 믿고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했으나 정작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공부는 그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수능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제일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을 즈음이 다가오자 나름 열심히 준비를 했다. 어쩌면 준비라기보다는 흉내에 가까웠던 것 일지도 모른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독서실에 다니고 인강을 듣고,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보는 식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수능에서 좋지 못한 점수를 받고서 일단 대학을 들어갈지, 재수를 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군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입대를 하고 나서 전역을 목표로 살아왔던 시절도 있었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는 게 현실로 다가오고 체력이 좋다고 자부하던 나조차 하고 나서 며칠을 앓아누웠던 40km 야간행군과 매일같이 해야 하는 체력단련 등에 익숙해져 가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전역 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하늘을 찔렀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부푼 마음을 가지고 길었던 2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전역을 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꿈에서도 그리던 전역을 하고 나서 하늘을 찌르던 자신감을 바닥을 쳤고, 자존감마저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대라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라고 인식하며 지내다가 어느 곳에서도 나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았을 때 함께 찾아오는 상실감과 절망감은 나를 작아지게 만들고 위축 들게 만들었다. 자존감마저 바닥나서 매일 술에 의지하며 지내던 중에 우연히 면접 보게 되었던 회사에서 덜컥 일하게 되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었던 자신감은 회사를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인정받으며 회복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3년을 더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20대의 정확히 중반에 이르렀을 때 퇴사를 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퇴사를 하고 뉴욕에서 한 달 정도 지내보면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살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철인 3종 경기도 나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즈음이 아니면 더 이상 일을 놓고 살아가도 되는 시기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퇴사를 하고 뉴욕에도 다녀오고,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했지만 내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도전했던 하프마라톤을 완주했을 때 22km를 쉬지 않고 뛰었다는 뿌듯함보다 완주를 하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내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기대하며 뛰었던 그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결승선에 도달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속았다는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했다. 마지막 계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새로운 층으로 가는 첫 계단이었고, 산의 정상이라고 믿고 달려왔던 곳이 알고 보니 산 중턱의 어딘가 였을 때 방향을 잃고 주춤하기도 했으며 터널 반대편에 보이는 어렴풋한 빛 한줄기를 보며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도착했다고 믿었을 때 아직 가야 할 길이 훨씬 더 멀었다는 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또 있었을까.


지금은 특정한 목표를 설정해두고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인 듯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최근에서야 차를 구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차를 산다고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도 아니며 지금이랑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살면서 이미 여러 번 겪어봤기 때문이다.


이제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윤곽이 조금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다. 목표했던 것들을 이루거나 그렇지 못했어도 삶은 이어져가고 있다. 수능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얻었고, 군대를 나오면 모든 해낼 수 있다고 자부하던 모습도 없어지고, 퇴사 후 내 삶을 살겠다고 하고 싶은 것들을 했을 때 돌아오는 허무함까지 느꼈지만 지금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


어쩌면 삶은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다. 대학을 가지 못 했기 때문에 군대에서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퇴사를 결심해볼 수 있었고 퇴사 이후의 삶이 어떤 느낌인지 비교적 빠른 나이에 알 수 있었으니 앞으로 해야 하는 고민들을 일찍 겪어볼 수 있었다. 결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중요했던 거 같다.


단언컨대 마음의 안정과 행복은 목표했던 많은 것들을 이루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삶과 일상 속에서 가끔씩 찾아온다. 매일 행복할 수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찾아온다는 말처럼 행복을 가까이 두고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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