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중섭 Jan 15. 2023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2023년 새해를 맞아

2023년이다. 새해의 1월이 주는 설렘을 좋아한다. 찾아보니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새해에 든 생각을 글을 썼다. 과거에 내가 이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함이 느껴지는 내용도 있다. 신기하다. 언젠가 새해에 적은 글을 모아 책으로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30년 정도 축적되면 분량도 적절하고 아주 재밌을 것 같다.


2022년 - 순간아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2021년 -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계획

2020년 - 이때는 없다. 찾아보니 <결혼의 종말> 원고 마감을 한참 하고 있었다

2019년 - 새해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으레 그렇듯 신년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하루하루 걸어가며 충만한 감정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생이라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외부 환경뿐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도 바뀌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는 전혀 다른 인간이고, 30대 초의 나와 30 중반 현재의 나 역시 여러모로 꽤 다른 인간이다. 아마도 40대가 되고, 50대가 되면 마찬가지로 큰 변화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고.


예전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키워드는 사랑, 관계, 심리, 불교이다. 사랑을 삶의 중요한 가치관으로 설정하면서, 관계와 심리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불교는 종교적 가르침보다는 마음 챙김의 맥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왜 이럴까,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우리는 왜 이럴까 등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가지게 된 분야이다.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자기 객관화를 부단히 시도해 보기 마련인데, 이 과정을 반복하고 주변으로부터 피드백을 듣다 보면 어느 정도 나라는 사람의 기질과 성향, 그리고 문제에 대해 윤곽이 보인다. 물론 내가 틀리거나 스스로에 대해 과대평가할 수 있지만.  


위와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불완전하고 적당히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나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이 말이 참 좋다. "세상이 정상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알고보면 모두가 적당한 상처와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고, 불완전하고 감추고 싶은 모습 역시 동시에 가지고 있다. 휴 다행이다. 나만 그런 것 아니었구나. 야릇한 안도감이 드는 것을 보면 나도 참 성인은 못 된다.


한편, 요새 내가 주장하는 개똥철학 중 하나는 '흙탕물 이론'이다.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흙탕물 이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보기에, 관계를 맺는 타인은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 등) 모두 크고 작은 슬픔을 준다. 만남의 단계에는 기쁨만 존재할 수 있지만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 이때 관계를 맺는 타인은 때때로 혼탁한 흙탕물의 역할을 한다.


자신의 마음을 그릇이고 자신과 관계를 맺는 타인이 주는 슬픔을 흙탕물이라 생각해 보자. 간장종지만 한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는 흙탕물이 한 방울만 들어가도 소용돌이가 생긴다. 하지만 세숫대야 정도의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는 흙탕물 한 방울은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그는 흙탕물 한 방울 정도는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편, 한 바가지 정도의 흙탕물은 세숫대야의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개천과 같은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 바가지 수준의 흙탕물은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이런 사고를 전개하다 보면,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 바다와 같은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떠한 수준의 흙탕물이 침범해도 변화가 없다. 그는 모든 인류를 너그러운 관용과 사랑으로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마도 예수, 석가모니 수준의 성인이 바다와 같은 그릇 수준일 것이고 간디, 마더 테레사, 마틴 루터킹 같은 분들은 강 정도가 아닐까. 이외 알려져 있지 않은 무수한 의인들은 작은 개천 정도의 그릇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우에는 현재는 간장 종지에서 작은 컵 정도의 그릇이라 생각되는데 (슬프게도 이 또한 과대평가 된 것일 수 있다), 부단한 인격 수양을 통해 욕조 정도로 이를 늘리는 것이 목표이다. 어차피 나는 바다 같은 성인이 될 수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딱 이 정도가 내가 지향하는 바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가 흙탕물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급적 내가 상대에게 주는 슬픔의 강도와 빈도 역시 최소화하고 싶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다. 사람이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신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문제를 깨달은 뒤 관성대로 살아온 습관을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으니까.


변하고 싶고 해결책도 알고 있는데 실천이 참 쉽지 않다는 말을 하니 내 말을 듣던 의사는 이런 조언을 해줬다. 0이 본성대로 나오는 습성이고 5가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이고, 10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저히 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면, 6에서 7 정도 수준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꾸준히 해보라고. 이 조언은 확실히 도움이 된다. 나는 말할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고 (원래 이전에는 필터 없이 말하면서 친절하지 못한 것을 솔직함과 구분하지 못했다. 아, 나는 누군가에게 얼마나 흙탕물이었을까. 새삼 반성이 된다), 의식적으로 고마움, 칭찬 등의 긍정적인 감정 표현을 예전보다 더 자주 하게 되었다. 또한, 갈등이 생길 때 회피하거나 상대방 탓을 하기 보다는 주어를 '나'로 해서 담담하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일상에 작은 기적이 생겼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나는 지금의 작은 변화가 마음에 든다.


최근에 나를 오랜만에 본 지인들은 사람이 좀 바뀐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푸근해 보인다는 느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나의 답은 사람의 선천적인 기질과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후천적인 경험과 시도로 사람은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의식적으로 변한 척이라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라쇼몽의 대시를 빌리자면, 자기 자신까지 속여버리면서 말이다. 참, 좀 속인다고 하더라도 뭐 어떤가? 인간이 원래 서로 적당히 속고 속이면서 무대에서 1인 다역을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의 잔혹함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