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아니 그런 롤 말구요
포커페이스를 잘하는 이들의 비결이 늘 궁금했다. 학교에서든, 회사에서든 마찬가지였다. 표정을 감추거나 꾸며내는 게 부러웠단 건 아니다. 선생님 / 상사에게 된통 깨져도 별 타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친구 / 동료와 트러블이 생겨도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사람이 대단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건 그들 모두가 훌륭한 롤플레이어(Role Player)였단 사실이다. 타인 앞에 본모습을 얼마나 드러내느냐의 차이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 충실한 롤플레이어야말로 그 역할이 끝났을 때 캐릭터를 훌훌 벗어던지고 원래의 자신으로 쉽게 돌아가는 거였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게 참 어려웠다. 때때로 내가 맡은 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행여 누군가 나의 롤을 비판하기라도 하면 반발하거나 의기소침해 졌다. 나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따금 얻은 성취나 칭찬에는 지나치게 우쭐해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일희일비였달까. 아니, 일희삼(三)비쯤? 희(喜)의 영광은 금세 잊히는 반면 비(悲)의 상처는 깊고 오래가기 마련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학교 / 회사에서의 롤플레이를 종료시키기 힘들었던 나의 스트레스는 점점 쌓여만 갔다. PC나 모바일에서 무거운 게임 프로그램을 계속 켜놓고 종료하지 않으면 기기의 속도가 느려지듯, 학교나 회사에서의 롤플레이를 쉽사리 떨치지 못한 나의 몸과 마음은 무거워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과거는 그랬다 치고 현재를 한 번 살펴본다.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나이를 더 먹어서인지 주위엔 이제 예전처럼 학교나 회사에서의 롤플레이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대신 눈에 띄는 대부분은 남편 / 아내로서의 롤이나, 아빠 / 엄마로서의 롤에 충실하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가까운 이들을 보면 어쨌든 가족 간에도 서로가 롤플레이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어 보인다. 모처럼 친구들과 놀다가 신이 나서 통금을 어긴 한 친구의 예를 들어보자. 아내에게 호되게 혼난 그 녀석은 주말 내내 아이와 아내에게 더욱 충실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잠깐 좋은 친구(?)였다가 순식간에 싹싹 비는 남편이었고, 휴일 동안은 대체로 훌륭한 아빠였다. 아마도 내가 아는 친구의 모습과, 아내가 /아이가 아는 남편 / 아빠의 모습은 굉장히 다를 거다.
비즈니스에서든, 가정에서든 각자의 롤플레이에 충실한 사람을 보면 나는 여전히 배울 점이 많다고 느낀다. 때때로 '플레이어로서의 나'와 '참(眞) 나'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마음을 다치며 좌절했던 나로서는 그들의 레벨이 나보다 높다고 여겨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쪼렙인 걸까? 어떤 롤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또 어떤 롤에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적어도 예전과는 달리 내가 맡은, 맡아 나갈 롤(역할)이 여러 가지이며, 그 중 어떠한 것도 진짜 내 모습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덕분인 것 같다. 대체 '진짜'가 뭔지에 대해 논하자면 끝도 없겠다만.
어쨌든 앞으로 내게 주어질 롤플레이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행여 어떤 플레이에 실패하더라도 얼른 종료하고 다른 롤에 집중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꽤 높은 레벨을 달성하는 롤도 발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