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모습은 제각각.
당연한 얘기겠지만 병원에 가면 다양한 환자들을 만날 수 있다. 의사가 아닌 나로서는 그들이 진찰 대상 아닌 관찰 대상일 뿐이기에 보다 다양한 관점을 갖게 된다. 더욱이 내가 아파서 간 게 아니라면 - 식구 중 누군가의 정기 검진 같은 걸 돕기 위해 데려다준 경우 등이 있겠다 - 병원 안의 풍경을 비교적 여유로운 시선(?)으로 둘러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대형, 대학 병원에서는 중증 이상의 환자들을 쉽게 접한다. 만약 큰 병원을 처음 찾는 이라면 동네 이비인후과나 내과에서 간단한 검진을 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이동식 침상에 누운 수술 환자를 마주하기라도 하면 제아무리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시기 마련이다. 환자의 몸에 연결된 링거나 투석 주머니에 차 있는 선명한 핏빛을 본 순간 그가 겪어왔을 고통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모처럼 유명 대학 병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한눈에 봐도 수척한 얼굴을 한 노년 부부가 진료 확인서인지 예약증인지 모를 종이를 손에 쥔 채 비척비척 걷는 모습을 보았다. 이윽고 그들을 진료 대기실로 안내하는 간호사의 표정은 지극히 건조하고 냉랭했다. 어릴 땐 그게 불친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젠 달리 보였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그런 환자들을 대할 의료인에게 매번 따스함을 기대하는 건 이상에 불과하단 걸 익히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잠시 뒤 나는 '어~~ 어~~'하는 반복적이고 낮은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초점 없는 눈으로 입 벌려 소리를 내는 소년이 휠체어에 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뒤에 선 중년의 남성은 아내로 보이는 여성에게 '당신은 수납 창구에 가 있어'라며 휠체어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비교적 조용했던 대기실에서 크게 난 소리에 나 말고도 환자를 향한 시선이 제법 많았는데도 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이동했다. 매우 익숙해 보이는 그 모습이 담담하다 못해 당당해 보여서 감히 안쓰러운 마음을 품고 말았다.
지금껏 나는 제법 큰 수술을 두어 번 받은 적이 있다. 중환자라고 할 순 없었지만, 큰 병원 한 번 가 본 적 없다는 사람들에 비하면 적잖이 피곤한 경험을 지닌 셈이다. 잔병치레와는 결이 다른 그 기억들 덕분에 성인이 되어서도 건강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덕분에 나는 쇠약했던 시절과 대비되는 건강한 일상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평균 이상으로 감사해하는 편이다.
어릴 적 보았던 대학 병원의 풍경을 떠올려 본다. 엄마 손에 이끌려 학교 수업을 처음으로 빠지고 간 그곳은 엄청나게 삭막한 공간이었다. 리놀륨 바닥을 미끄러지듯 오가는 간호사들의 슬리퍼 소리, 어디서든 코를 찌르는 알 수 없는 병원 내음... 진료를 앞둔 어린 소년이었기에 결코 흥미롭거나 무신경하게 받아들일 수 없던 독특한 풍경이었다. 그 뒤로 나는 큰 병원 입구에만 들어서면 종종 숨 막히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세상엔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 '건강함에 감사해야지...' 등등의 생각에는 어떠한 잣대도 들이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큰 병원에 가면 그러한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환자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상대적인 행운 내지는 행복을 발견하는 게 꼭 나쁜 일도 아니라고 본다. 아픈 사람이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할 수 있듯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을 측은히 여길 수 있는 게 당연한 이치일 테니까 말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다. 너무나 건강한 상태로 들른 대학 병원에서 다시금 확인한 명제랄까. 병원이 한가로이 구경할 만한 공간은 절대 아니겠지만 많은 생각을 품게 해주는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그 어떠한 스트레스도 환자들의 고통에 비할 바 아니란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행복과 불행의 명백한 차이를 진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