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빚지고 또 되갚는.
사실 우리는 삶의 여러 순간 타인에게 목숨을 기대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누군가 내 목숨을 좌우할 수도 있는 상황을 때때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산단 뜻이다.
이는 사고 소식을 접하거나 직접적인 위기 상황을 마주할 때 품게 되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철없는 아이가 아파트 위에서 돌을 던져 길을 가던 노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고라든가, 느닷없이 인도나 상가로 돌진한 차량이 거기 있던 사람을 치어 죽인 사건을 들 수 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피해자들로서는 그야말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들이다. 이러한 위험을 알게 된 이상 길을 걷거나 서 있는 일에도 실은 생명이 달려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남의 소식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따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산다. 범죄자가 머리에 총구를 들이민다거나 맹수가 우글대는 초원에 맨몸으로 놓이는 극단적인 상황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씽씽 달리는 버스나 택시에 몸을 실을 때 가끔 난 생각한다. 기사님이 피곤해서 졸거나,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영락없이 큰 사고로 이어질 테고 나를 포함한 승객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운전자가 가족이나 친구인 경우라 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꼼짝없이 남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상황임을 쉽게 잊은 채 남이 모는 자동차에 기꺼이 몸을 싣는 위험을 감수한다.
번지점프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때를 떠올려 본다. 다른 게 아니라 난 그 체험들을 위한 장비를 착용하던 순간 가장 큰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손때 가득한 안전 조끼며 실밥이 튀어나온 로프, 삐걱대는 연결 고리를 보았을 때 나는 이 장비들이 과연 100% 기능을 발휘할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착용한 장비를 두세 번 손으로 튕겨보는 안전 요원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못해 심드렁해 보였다. 그럼에도 난 '이거 확실히 안전해요?' 같은 의혹의 한마디조차 뱉지 않고 높은 상공에서 뛰어내리거나, 날아올랐다. 그날 처음 만났을 뿐인 완벽한 타인에게 나의 안전과 생명을 맡겨버린 셈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무방비/위험 상태에 놓이는 건 특별한 체험의 순간만이 아니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차도 옆을 바짝 걸을 때, 낡다 못해 군데군데 금이 간 빌딩에 들어설 때, 아찔한 절벽을 옆에 둔 좁은 등산로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갈 때 등등... 위험천만한 상황에서조차 생면부지의 타인을 '암묵적으로' 신뢰하는 게 일반적이란 사실을 떠올려 보면 한 사람의 생명이 꼭 본인에게만 달렸노라 단언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 우리는 타인의 작은 실수가 내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눈 감고 사는 존재들이다. 천길 낭떠러지 근처에서조차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다른 사람과 거리낌 없이 부대끼는 모습은 어떠한가. 누군가 위에서 뭐 하나만 떨어트리면(고의든 실수든) 크게 다칠 게 뻔한 고층 아파트나 건물 아래를 마음껏 활보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경우를 타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깔린 행동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온갖 불신이 넘쳐나는 세태를 보면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도처에 놓인 위험에 눈 감는 이유는 타인을 철석같이 믿어서라기보다는 끔찍한 일을 당할 확률이 높지 않다는 사실에 기대어 일상을 영위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안전을 따지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오늘도 난 시속 7~80킬로미터를 훌쩍 넘겨 달리는 광역 버스를 타고 차들이 가득한 도로에서 생존(?)하며 문득 생각했다. 안전벨트를 맨다 한들 이 버스가 마주 오는 차와 그대로 부딪치면 내 몸뚱이는 과연 성할 것인가? 그러고 나서 바라본 운전석 기사님의 어깨는 유난히 좁아 보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믿어야 할 대상이 가족도, 신도 아닌 생애 처음 본 왜소한 아저씨라는 사실이 갑자기 너무 놀랍고 낯설게 느껴지는 거였다.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기댄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를 명심한다면 생각보다 타인에게, 또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 질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면 내가 지금껏 무수한 생의 위기를 넘길 수 있던 건 타인의 일반적인 행동 덕분이니까. 남들도 나처럼 평범하며, 내가 그를 믿은 만큼 그도 나를 믿은 덕에 별다른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니까. 삶을 무수히 빚지고 또 되갚아 가는 일상의 무게가 가벼울 리 없단 사실을 되새기면 평범했던 하루도 특별하게 느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