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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참, 곱다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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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Apr 18. 2023

그대라서

사랑합니다

사랑한다 말한 적 있던가요?

어렴풋이라도 떠오를 줄 알았어요. 웬걸요, 그런 말 쑥스러워서 잘 못한다는   쏘는 페퍼민트처럼 강한 향으로 남았네요.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선명하죠. 박서준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고 방시혁처럼 장안의 거부도 아니지만 빈틈 채워주던 한결같은 그 모습사랑이라고 해석한 마음엔 이미 무서울 게 없다는 것을.


 놀라운 일이 벌어질 거예요. 농담처럼 장난처럼 그냥 그렇게 얼버무렸던 그 말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말할 비가 되었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낸 후에도  빈 역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나를 묵묵히 기다렸던 단 한 사람. 오직 그대라서 손을 잡았죠. 운명처럼 기적처럼이라기보다는 하얀 첫눈처럼 몰래 다가온 기쁨이었죠.


사는 게 서툴러서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숨차게 걸었죠 우리.

넘어지고 깨져도 한 걸음씩 오르며 불어오는 바람에 슬픔의 무게를 덜어보냈 지난 시간.

부족하지만 함께 부르던 노랫소리 각박한 세상이 들이민 낯선 임무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졌죠 그때, 

인생이라는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느라 까만 머릿결은 윤기를 잃었고 몸짓은 단단함으로 치자면 함량 미달되고 말았어 사실.


그래도 상관없어요.

동이 트면 가젤도 뛰고 사자도 뛴다잖아요. 먹히지 않고 굶지 않기 위해서. 주어진 상황은 좀 불리하지만 성실하잖아요 우리. 그랬던 것처럼 죽 쑨 얼굴 집어치우고 서러움도 걷어치워요. 다시 시작이라는 이름으로 함량 미달쯤이야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최선을 다하는 가젤과 사자처럼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묵묵히 애써줘서

넘어져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줘서

불쑥 튀어 오른 고난 앞에서도 상심하지 않고 버텨

부끄럽지 않게 살게 해줘서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세상을 보여줘서

흠 없는 사람이라고 바라봐 줘서

고마워요 그대


참 많이 의지했어요.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한쪽 어깨 다 적시며 온전히  

내게 우산 받쳐준 그대.

그래서 더 미안해요


더는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말하고 싶어도 지금처럼 저장만 해둘지 모르니까요.

쑥스러움은 피차일반이나 늦기 전에 꺼내봅니다. 


사랑합니다 그대라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김광석)라는 노래 제목처럼 어느새 그즈음에 도달했다는  알아챕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기뻤던 날도 미워질 만큼 서운했던 날도 새살이 차오르지 못해 아팠던 날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날도 까맣게 잊힌 날도 마이너풍 트롯 발라드의 애달픈 사연이 되어 흘러간 세월에 촘촘히 박혔더군요. 쌓인 날들이 있기에 잔잔할 것 같지만 지금도 종종 마음에선 거센 물결이 일곤 합니다. 남은 날들이 '괜찮음'에 닿은 듯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맘으로 지나간 날의 스케치를 되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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