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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Dec 10. 2021

직장에 질척거리지 말자.

직장 생활 소고

어제 부서 막내와 단둘이 점심을 먹었다.

꽤 오래전에 잡은 약속이긴 했는데, 막내 사원은 그날 오후 반차였다.

부랴부랴, 난 괜찮으니 반차면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지만, 휴가는 오래전에 잡아놓은 거라 괜찮다는 알 수 없는 답변을 하길래, 내가 여기서 집에 가라고 하면 더 마음이 불편하겠구나 싶어서 같이 식사를 했다. 

- 휴가 일정을 먼저 잡고, 점심 약속을 잡은 것이니 늦게 집에 가는 건 감안한 것이라는 말인지, 단순히 선배가 혼밥을 할까 봐 걱정이 돼서 일단 이유를 댄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그리 어려운 선배는 아닐 테니, 억지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처음 이 회사를 와서 신기했던 건 부서원들이 서로 같이 밥을 먹지 않는다는 이었다.

부서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에 같이 식사를 했고, 부장과는 격주에 한번, 화요일에 식사를 했다. 

경력직이다 보니 회사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이래저래 업무상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는 그 핑계로 점심을 하자며, 약속을 열심히 잡았다. 

초반 몇 달은 카드 값에 놀랐지만, 뭐 이것도 이직 비용이 아니겠는가?


막내 직원의 경우, 공채기도 했고, 부원들이 초반 6개월은 돌아가며 점심 일정 순번을 짰었다.

수습기간인 6개월이 지나자, 덜렁 남겨진 막내는 무척 당황스러웠고 했다.

지금이야, 여직원 휴게실에서 잠도 자고, 사내식당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느긋하게 책 본다지만, 이미 회사 생활 경험이 있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연스럽게 부원들끼리 점심에 식사를 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원들끼리도 2~3주 전에 약속을 정해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문화가 낯설었다고 한다.


막내 직원은 모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를 해서 3년을 재무팀에서 근무한 중고 신입이었다. 

인사 업무를 너무 해보고 싶어서 다시 신입으로 도전한 케이스다.

그렇게나 하고 싶었던 일인데, 공채를 하면서 현타가 왔다고 한다.

사실 어떤 포인트에서 그랬을지 너무나 잘 이해가 갔다.


내가 30대 중반만 되었더라도, 나 역시 그만뒀을 것 같다.

혹자는 정말 좋은 회사라고 하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장기근속을 한다.

- 대부분은 장기근속을 하지만 신입사원들이나 경력직들은 적응 못하고 그만두는 비율도 높긴 하다.

급여가 업무의 난이도, 책임감, 기술 수준에 비례하지 않고 평등? 한 호봉제이다.

심지어 퇴직금 누진제가 아직도 존속한다.

- 나는 퇴직금 누진제를 폐지한 취업규칙 개정 이후 입사한 신규 입사자에 해당하여, 해당 퇴직금 누진제를 내가 적용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막내 직원은 심각하게 퇴사를 하고 로스쿨에 도전할 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제일 친한 친구 둘이 변호사인데, 자기 방에서 일 다운 일을 하는 모습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을 고민할 때 학비 때문에 망설였지만, 변호사로 사는 건 평생이고, 나는 아직 20 대니 한번 도전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 회사는 수기 업무가 정말 많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 일단 신 문물이 익숙하지도 않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정년까지 보장이 되는 회사니, 어찌 보면 이 회사의 승자는, '조금 뻔뻔한 사람'이다.

상명하복 문화가 뿌리 깊은 회사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을 안 하고 놀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도 못한다.  사실 같이 일을 하면서 누구는 열심히 하고 (내지는 해야만 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게 억울할 수도 있지만, 내가 힘들었던 포인트는 다른데 있다.


단순한 잡 일도 내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순한 일을 너무 어렵게 하고, 어렵게 한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ERP 프로그램으로 처리한 업무를 계산기로 다시 두드려서 확인을 시키는데, 군대조직과 흡사한 조직에서 다년을 굴렀던 나도 이건 견디기 힘들었다.

굳이 자동화 처리를 한 걸 오류 많은 Human System으로 다시 검증을 하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어서다.


인사 관련 저널에서 읽은 내용인데, 사람들은 위로 갈수록 책임의 정도가 커지니,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스트레스가 제일 심한 사람들은 조직의 말단에 있다고 한다.


위에서는 그래도 자기가 생각한 바를 어느 정도는 실현을 하는 경험을 회사에서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직이거나, 뚜렷한 자기만의 일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게는 조직에서 주어진 일을, 조직에서 주어진 방식대로 해야 한다. 

그 간섭의 정도가 심할수록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발현시킬 기회를 잃고 자포자기 상태가 된다.


부서 막내 직원 동기인, 나의 멘티는 수습기간을 채우고 그만두었다.

그때 나는 멘티에게 어줍지 않은 조언을 했었다.


"보람은 회사 끝나고 찾아야 해요. 그래도 여기는 안정적이니까, 다닐만하지 않나요?"

나 자신도 그런 식으로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의 저자 박소연 작가가 쓴 옴니버스 형태의 소설을 읽었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구절들이 있어 옮긴다.

어쩌면 나 역시 직장에 질척거리는 스토커 인지도 모르겠다.


"직장에다가 끊임없이 가슴 뛰는 자극과 설렘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아?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그거 되게 질척대는 거다, 너.”

- < 재능의 불시착, 박소연 > 중에서


“그렇게 자기 편하자고 프로그램에만 의존하는 버릇이 들면 안 돼. 회사 업무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손쉽게 요령 피워서 할 생각하지 말고 꼼꼼하게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지. 이거 봐. 숫자가 안 맞잖아. 보이지?”

의기양양하게 계산기를 내미는 앤드류를 보자 강 선배는 그동안 참았던 인내심의 끈이 어딘가에서 툭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굳은 표정으로 계산기는 보지도 않은 채,

‘아니요. 잘못 누르신 것 같은데요.  그 계산기가 틀렸을 테니 다시 해보시죠.’라고 말했다.

- < 재능의 불시착, 박소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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