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연애하자~, 고마워”
“나 오빠 여자친구 하고 싶은데, 우리 연애할래요?”라는 너무도 당돌하면서 솔직한,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고백에 내가 한 대답이다. 고맙긴 뭐가 고마운지… 여전히 나는 찌질한 남자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답이었다. 조금은 더 멋지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먼저 고백을 해서 좀 더 남자다운(?) 모습을 보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건 나의 머릿속의 생각들 과는 달리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저 말이었다.
나의 답을 들은 그녀는 세상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의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오빠 그럼 우리 연애하는 시작하는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삼겹살 어때요?”
“응 ~ 그래, 뭔가 하루종일 긴장을 해서 그런지 나도 배가 엄청 고프네~ 가자”
그랬다. 소개팅을 하고 몇 주간 소위 말하는 썸을 타면서 연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데이트 비슷한 것들을 하면서 지내왔지만 오늘은 약속을 잡을 때부터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남자의 직감은 먼지만큼이나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늘은 약간 다른 날과는 기운이 달랐다.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고 있는 느낌을 공유하고 있고 순간순간 손을 잡는 경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같이 있는 시간 자체가 너무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건 내가 느끼는 감정이고 생각일 뿐, 그저 그녀의 생각과 감정은 나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남자라고 하는 존재들은 온갖 쎈척과 허세로 무장하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타이밍과 시점에는 주저하는 멍청이인지라. 나 역시 그녀에게 고백은 해야 한다고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근데 오늘은 왠지 느낌이 달랐고 고백을 하면 오늘 해야 한다고 나 나름대로는 타이밍을 잡고 있던 터에 그녀에게 타이밍을 보기 좋게 뺏기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타이밍을 뺏긴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오랜 연애를 마치고 한동안은 연애의 생각이 별로 없던 시절이 있었다. 주변에선 다들 ‘시간 낭비다’ ‘부질없는 짓이다’ 등등의 온갖 말들이 난무했지만 나는 나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전 연애를 추억하거나 추도하는 시간 같은 건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아마도 맞는 거 같다. 꽤 오랜 시간 연애를 했고 잘하면 그 사람과 결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에 아는 후배한테 연락이 왔다.
‘형 아직 연애 전이지요?’
‘응 아직’
‘썸 혹은 만나는 사람은 있으세요?’
‘없다.’
‘아~ 다행이네. 형 혹시 소개팅하실래요? 형이랑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애가 있는데 만나 보세요. 게한테 물어보니 좋다고 하네요’
‘엥?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알고? 내 사진이랑 개인정보 뿌렸냐? 죽을라고’
‘뭐… 암튼 만나 보세요 그리고 맘에 안 들면 죽이든지 말든지 하시 구요, 연락처는 010-*****-*****이예요, 연락해 보세요’
‘음… 알겠다. 암튼 고맙다’
‘넵’
말은 그렇게 했지만 뭐, 그래도 소개팅이라도 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도 했다. 대부분은 소개팅해 달라는 말로만 ‘알겠다’ ‘한번 찾아 볼게’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니까.
그렇게 얼마 있지 않아 문자가 한통 왔다.
‘안녕하세요 전 윤슬 이라고 합니다. ### 한테 연락처 받아서 연락드려요~’
퇴근하고 나서 연락해 보자는 나의 안일함에 엄벌이라도 내리는 듯 한 문자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전 김준한이라고 합니다. 이름 되게 이쁜데요’
‘네~ 순우리말이고 저도 제 이름 너무 좋아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제가 이따 저녁에 퇴근하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넹 그렇게 하세요~ 꼭 하셔야 해요’
‘넵 꼭 할게요’
그녀의 이름은 ‘윤슬’이었다. 순우리말이라고 하는 말에 검색을 해 보니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의미를 지닌 이름인 거 같았다. 게다가 성까지 윤 씨였으니 이름과 정말 잘 붙고 누가 지어주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마도 조부모는 아닐 거 같다는 생각정도. 그렇게 퇴근을 하고 어느 때와 다름없이 운동을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가던 중 다시 한번 문자가 왔다.
‘퇴근하셨어요? 야근 하시나?’
‘아~ 아닙니다. 퇴근하고 운동하고 집에 가는 중입니다. 근데 어떤 일 하시는 분이진지 듣지를 못해서요 혹시 회사 다니시면 퇴근하셨나요?’
‘아니요~ 전 아이들 무용 가르치고 있어요. 나름 원장입니다 ㅋ 근데 퇴근하고 연락하신다고 하더니….’
‘아… 네 운동하고 집에 가서 연락하려고 했는데.. 음 늦었네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처음이니까 봐 드릴게요 집에 가서 연락 주세요 꼭 이번에는’
‘네 알겠어요’
약간 피곤한 스타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퇴근하고 나서 연락한다고 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퇴근하고 나서’와 그녀가 생각하는 ‘퇴근하고 나서’는 다르다고 생각을 했고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 그냥 일반 직장인의 생활을 잘 모르겠거니라고 생각을 하고 넘겼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피곤한 스타일인가?라는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처음 연락에서부터 나는 온통 타이밍을 그녀에게 뺏긴 체 시작을 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의 고백까지 그녀에게 순서를 내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