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무런 일정도 없는 일요일이다. 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고 쉬겠다고 했다. 대략적으로 계산해 보니 한 달에 한번 있는 그날인 거 같다. 아무리 여자친구라고 해도 별 걸 다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을 뒤로하고.
‘몸은 괜찮아? 뭐 좀 먹었어?’
그렇게 문자를 보내 두고 오랜만에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 두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어느덧 earth, wind and fire의 ‘september’가 완벽하게 어울릴 만한 9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인간이 지구를 너무 괴롭힌 나머지 9월도 이젠 가을 같은 느낌이 덜하다. 여전히 낮에는 너무 덥고 무섭도록 강한 태풍으로 인해 비도 많이 오고. 그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 거실에 덩그러니 서 있는, 이젠 본인의 역할을 모두 마치고 쉬러 가기 위해 나를 세척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선풍기가 나를 보고 있다. 이제는 분리해서 넣어둬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던 중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음… 오늘은 좀 심한 거 같아. 오빠가 스트레스받게 해서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ㅜㅜ’
‘미안해…ㅜㅜ 그래도 약 먹어야 하니까 뭐라도 좀 챙겨 먹어’
‘알겠어 나 좀 괜찮아지면 연락할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응 알겠어 적당히 걱정하면서 있을 게’
‘ㅎ 그래도 나를 여전히 웃게 해 주네. 알겠어’
그러게 멍하니 있다가 날씨도 좋고 해서 갑자기 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난 정기적으로 달리기를 하는데 최근 이런저런 일 때문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핑계 때문에 뛰질 못했다. 근데 뭐 너무 덥기도 했었고 뛰러 가려고 하면 비가 오기도 했었고.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항상 러닝을 하는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물론, 그녀에게는 운동하러 간다고 미리 연락은 해 둔 상태였다. 예상대로 날씨는 러닝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직은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뛰어도 충분한 그런 날씨.
그렇게 스마트워치에 러닝모드 세팅을 하고 뛰기 시작을 했다. 난 러닝을 할 때 음악을 듣거나 하지 않는다. 나에게 러닝은 일종의 명상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일주일간의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생각해야 할 것들을 달리면서 계속 생각해 보는 그런 과정이다. 그리고 목표했던 거리가 끝날 무렵엔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좀비 마냥 뛰고 있는 그런 상황의 연속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난주에 처리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회고해 보고 그에 대한 다음 주에 할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그러던 중 마치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처럼 어제 친구에게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욕을 먹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리곤 생각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쌓여 나가기 시작을 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여자친구 혹은 아내에게 크기에 상관없는 실수를 한다. 실수가 아니더라도 서운함을 느끼게 한다. 나 역시 아니라고 말한 순 없다. 여전히 그런 실수(?) 때문에 곤욕을 치렀고 지금도 치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난 어쩌다 생겨난 능력(?)인 ‘하루 만회하기’ 덕분에 나름 잘 만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는 바뀌지 않은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을 다시금 돌아보니 그런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그 전날-아니 같은 날의 어제- 내가 했던 행동과 똑같이 한 상태로 그 사건만 바로 잡아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불현듯 ‘그럼 아예 다르게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최종 결과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이사 후 그녀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발견된 편지함이 문제였기에 편지함을 숨기려고 하는데 급급했는데 만약 그녀가 그날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면 아예 발생도 하지 않지 않았을까?
‘그래, 그럼 혹시 다음에 ‘하루 만회하기’가 다시 발생하게 되면 그 전날과는 아예 다르게 살아봐야겠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나의 러닝은 마무리되었고 나는 꽤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그럴싸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뿌듯했다.
일 할 때 항상 내가 팀원들에게 하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남자 후배들에게는 ‘남자들이 하는 허세 중 가장 심각하고 쓸모없으며 별로인 건 스스로가 대단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잔소리한다. 그런 내가 내가 늘 하는 말의 미궁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엔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