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에 다시 찾아간 교토에서의 첫날
오후 비행기로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 JR특급을 타고 교토역으로 향했다. 교토로 가는 열차 안에서 밤은 완연해졌고, 우리는 교토역에서 다시 열차를 두 번 갈아타며 산조 역에 도착했다. 두 번째 방문하는 교토, 밤이지만 낯익었다. 지난번에는 낮의 기온 시조 역이었지만, 가모 강의 다리 간격만큼 떨어진 서로 가까운 전철역이라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부근에 예약해 둔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 뒤에 우리는 바로 나왔다. 밤 9시에 가까운 시각의 토요일, 여행자에겐 시간이 생명이자 돈이다.
미리 알아 둔 수제 맥주집이 걸어서 갈 수 있는 부근이어서, 먼저 그 집을 찾아갔다. Komachi Beer라는 시장 골목의 작은 맥주집에서 나는 IPA를 아내는 스타우트를 주문하고 몇 가지 안주와 함께 교토 여정의 첫 시작을 기념했다. 수제 맥주는 맛있었지만, 조금 아쉬웠다. 우리는 다시 폰토초로 자리를 옮겨 눈에 보이는 오코노미야끼 집으로 들어가 에비스 맥주와 함께 간단한 오꼬노미야끼를 먹었다. 토요일 밤의 폰토초는 번잡했고, 가게 TV에서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패널로 출연한 주간 시사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김정은과 트럼프의 갈등은 주요한 관심사였다. 때마침, 남한의 국군의 날 행사 주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재밌는 것은 화면을 분할하여 남과 북의 군인들이 격파와 무술 시연하는 장면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장면은 머리띠에 붙은 국기만 아니었다면 어디가 남이고 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비슷했다. 마치 이들에게, 남한과 북한은 군사적 입장에서 별반 차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장면이었다.
다음날 아침은 전날 밤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과 샌드위치 등으로 때우고 일찍 나와 걷기 시작했다. 일본에 오면 어떤 강박 같은 것이 있는데, 전철을 타기 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과 전철이 아니면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전철은 복잡해서 어쩔 수 없이 타기 전 제대로 파악하려면 공부를 할 수밖에 없지만, 지상에서의 이동을 걸어서 한다는 점은 그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사는 사람이 아니니 자전거가 없고, 택시는 겁이 날 정도로 비싸니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헤이안 신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의 동네 거리는 한적했지만, 9시 전후의 아침에 출근으로 분주한 사람들은 없지 않았다. 내비게이션 지도 앱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동네와 수로변을 걸어, ROHM theater를 지나 헤이안 신궁 정문에 다다랐다. 헤이안 신궁은 사실 넓기만 하지 볼 게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입장료를 내고 신궁 안의 정원을 산책했다. 일본은 정원의 나라였고, 신궁 내의 정원은 일본식 정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헤이안 신궁은, 마치 정원을 감상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듯 한 풍경이었다.
다시 걸었다. 이번엔 난젠지였다. 작은 동물원을 지나 다시 수로를 만나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젠지 입구에 도착했다. 높은 나무와 신궁과는 색이 다른 바랜듯한 갈색의 난젠지 본당을 구경하고 수로각을 구경한 뒤, 작은 사찰까지 둘러보고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철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점심이 가까워진 오전 시간이었지만, 다리는 벌써부터 아파오기 시작했다.
철학자의 길은 일본의 근대 철학자인 니시다 기타로가 걸었다는 작은 개천과 벚나무가 늘어선 길이다. 2킬로미터 정도로 은각사와 난젠지를 잇는 소소한 길은, 풍경만큼 소소한 개인주택들과 카페 음식점 공방 등등이 풍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길을 봄에 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이 길은 이미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대표적인 카페가 요지야이지만 굳이 요지야가 아니더라도 들어갈 만한 카페 역시 많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다리도 아팠고, 아들은 다리 통증과 배고픔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철학자의 길의 여유도, 요지야 카페에서의 쉼도 모든 것을 제대로 누리거나 즐길 수 없었다. 중간의 오멘 우 집에서 조금 기다린 끝에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오멘의 우동은 역사가 오랜 집이었고, 우동면은 풍만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면서 유자향이 은은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우동은 아니었고, 일본의 오랜 우동은 이렇게도 먹는구나 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은각사에 들어섰다. 아담하지만, 모래를 독특한 모양으로 가지런히 빗어낸 모습과 뒤로 이어지는 숲의 정원이 아름다운 절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은각사는 모래와 숲의 정원이 아닌, 이끼의 정원이었다. 언덕의 능선과 나무 사이의 정원을 부드럽게 점령한 이끼들의 단정함과 고름이, 되려 인간의 수고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깊은 산의 그대로인 자연상태가 아닌 인간의 손을 탄 정권이라는 공간에서, 인간이 다니는 길이 아닌 대부분의 공간을 몇가지 이끼가 단정하게 퍼져있고, 중간중간 버섯까지도 조용히 솟아오르는 모습은 손으로 다루되,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묘한 인상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원의 능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숲과 동네가 만나는 풍경은, 내가 교토에서 원했던 풍경 그대로를 연출하고 있었다.
은각사에서 지난번 교토 여행에서도 만났던 검도후배를 만났다. 그렇게 오후의 일정은 후배와 함께였다. 교토에 사는 친구이니 우리가 굳이 지도와 길을 검색해가며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후배는 숙소에서 신궁과 난젠지를 거쳐 철학의 길과 은각사까지 걸었다는 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버스를 타지 그랬냐 타박했지만, 사실 버스를 타보지 않아서 좀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도시샤대학의 윤동주 시비를 찾아가기로 했고 가는 방법은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은각사에서 조금 걸어나와 처음 타보는 버스였는데, 일본은 뒷문으로 타서 내릴때 앞문으로 내리며 버스비를 정산하는 방식이었다. 일본은 버스비도 비쌌다. 한번에 230엔씩을 내야했다. 참 비싸서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전거로 버티나 싶어졌다. 정산도, 거스름돈을 주지 않아 정확한 돈을 내야만 한단다. 버스를 많이 탈 거면 500엔에 하루 종일 이용할 수 있는 패스를 사는 것이 제일 낫다고 했다. 그걸 사서 타면 처음 타서 내릴때 기계에 넣고 날짜를 찍은 뒤, 그 다음 이용부터는 운전기사에게 내릴때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미리 사 둔 하루 패스를 이용했다.
도시샤 대학은 빨간 벽돌의 오랜 건물들이 들어선, 거대한 문화재 군락 같았다. 사립대학 중에서는 학비가 비싼 대학에 속한다고 했다. 조금 헤맨 끝에 작은 연못이 있는 구석 한 켠에 정지용 시비와 나란히 있는 윤동주 시비를 만났다. 윤동주 시비는 이미, 교토를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성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앞에도 두어 팀이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윤동주의 죽음엔 일말의 억울함이 있다. 사촌 송몽규와 심리적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친한 사이였다. 송몽규는 어린 시절 간도에서 독립군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귀가조치를 받은 경력때문에 일본유학 내내 특수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윤동주를 만나 ‘일본에서도 독립운동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며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이 화근이 되어 둘이 동시에 체포가 된 것이다. 둘은 같은 감옥으로 투옥되어 알다시피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약 한 달 차이로 사망하게 된다.
윤동주 시비에는 ‘윤동주는 코리아의 시인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후배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이 아닌 코리아라고 쓴 이유는 조총련의 반발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북한이라 할 수도 없으니 코리아라는 마지못해 서로 수긍할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동은 계속 버스를 이용했다. 하루 패스는 쓸 수록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니죠 성을 갔지만, 5분 차이로 입장은 마감되어서 바로옆의 신센엔 정원만 잠시 들러보고 나왔다. 다시 버스로 이동, 교토에서 검도용품을 구입할 수 있는 토잔도에 가서 후배의 가이드하에 필요한 검도용품을 구입했다. 어딘지도 모를 골목을 찾아들어가 들른 토잔도는 후배가 아니었으면 찾지도 못한 곳이었다. 골목을 다니면서, 곳곳에 붙어있는 정당과 정치인 포스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 포스터를 원하는 곳에 붙여둘 수 있다고 했다. 독특한 것은 인물을 내세우지 않은 일본공산당 포스터였다. 깃발을 날리는 강인한 표정의 여성을 간략하게 표현한 포스터.. 일본에서도 공산당은 이제 흔적이나 남아있겠지.. 했지만, 후배는 아니라고 했다. 공산당과 관련해서 가장 독특한 도시가 교토라고 했다. 가장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의 교토지만, 가장 영향력있는 야당 시의원의 소속이 공산당이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참 아이러니한 기분이었지만, 중국의 공산당이 자본주의를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하듯 여기서도 공산당이 시민들이 원하는 정책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불가능 할 일도 없을 현상이었다.
하루 일정은 마무리했다. 아무래도 열한 살 아들이 가장 고생했고, 나도 다리가 많이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해도 점정 저물어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폰토초와 니시키 시장 주변의 가장 번화한 구역으로 이동해서 후배가 안내한 초밥집에서 초밥과 맥주를 먹었다. 맛은 있었지만, 사정 변변찮은 유학생이 추천하는 음식점이 아주 훌륭할 리는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2차를 숙소부근의 선술집으로 옮겨 다시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여기서도, 아쉬움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음식은 괜찮았지만 손이 어딘가 아쉬웠고, 생맥주는 아주 맛있다 하기에 좀 부족했다. 할 수 없이, 어제 우리가 여정을 시작했던 Komachi Beer로 갔다. 거기서, 배는 부르니 수제맥주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후배는 수제맥주가 처음이었고, 나는 IPA를 먼저 소개하며 건배를 했다. 아내와 아들은 중간에 먼저 들어갔고, 나와 후배는 좀 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검도후배라지만, 4단의 실력으로 교토에서 유명한 사범에게 지도를 받는 내 선생이자 열한 살이라는 나이차의 까마득한 동생이었다. 수제맥주는 하루의 피로와 그간의 맥주량에 힘입어 취기를 가속했다. 내가 후배 앞에서 꼰대가 된 것은 아니었나, 지금 이 순간 되돌아보는 중이다. 그렇게 이튿날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첫 날의 교토여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