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곳에서, 제임스 설터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졌다. 한낮의 습도도 20%는 뚝 떨어진 듯, 뜨거운 햇살을 빼고는 바람은 건조하다. 이맘때쯤이면 지중해의 바람과 햇살은 어떤지 궁금해진다. ‘행복의 충격’에서 작가가 남프랑스에서 느낀 지중해의 바람, 카뮈가 말한 지중해의 바다의 뙤약볕은 바다 옆에 살고 있는 내가 느끼는 ‘이것’과 흡사할까. 이탈리아에 일주일간 들린 적이 있지만, 시칠리아나 산토리니까지 가보지 못한 것이 여전히 아쉽다. 낡은 메모지에 적혀 있는 버킷리스트-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돌무더기 위에 엎드려보기는 아직도 두 줄이 그어지지 못한 채 근 20년을 향해 가고 있다. 과거처럼 여행을 가는 것이 큰맘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맘은 먹어야 한다- 아직까지 나는 그 여행을 상상 속에 남겨둔다.
작가들의 여행기는 늘 흥미롭다. 나로선 한 줄로 고작 표현할 수 있거나, 그 순간에만 머무르다 사라질 것들이 치밀하게 세밀해졌다가 웅장할 정도로 확장된 글로 남겨둔다. -그런 성실함과 재능이 부럽다-일정이 빼곡하거나, 사실적인 여행기는 사실 잘 보지 못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제약되는 것 같아서, 두리뭉실하게- 두둥실 떠다니는 글이 오히려 더 취향에 맞다. 제임스 설터의 책도 그랬다. 하지만 그의 문장은 여행기라기엔 지나치게 시니컬하고, 담백해서 여행하면 떠오르는 ‘두둥실’한 감정, 설레고 흥미로운 것들보다 되려 그의 염세적이기까지 한 감성에 젖어버렸다. 두둥실 할 것 같았던 예쁜 여행이 아니라 그의 시선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불편했다. 그때 책을 샀을 때가 작년 봄에 이른 휴가를 다녀오고, 여름에 떠나고 싶은 허한 마음을 대리 충족하고 싶었을 때였는데, 나의 기대가 사그라드는 것만 같아서, 반 페이지 정도 읽다가 일 년을 책장에 방치해뒀다.
올해 떠난 여름휴가는 다시 내게 여름휴가 따위 없다고 다짐하게 만들 만큼 덥고 힘들었고, 오히려 지치기만 했다. 이런 다짐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 맞다. 여름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휴식’과 ‘여행’의 욕구를 이끌어내는 강한 자극제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바람은 불지 않으며, 공기는 습습해 숨이 막히지만 여름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 계절만큼은 자유로워도 된다고 유혹한다. 낮은 길고 밤은 짧으며, 밤에도 사람들은 너 나할 거 없이 거리를 맴돈다. 거리마다 활기가 넘치고, 나도 그들의 욕망에 휩싸이고 싶을 만큼 보내는 밤마저 안타까운 계절.
어제오늘 다시 그때 그곳에서를 읽으며 내가 보낸 ‘그때 그곳에서’는 어땠는지를 돌아보면서,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일본을 떠올렸다. 매년 봄이면 떠났던 가마쿠라! 그리고 오랜 우정을 만나러 떠나는 도쿄! 내게 매년 하나의 의식과 같았고, 칠월칠석 같은 3월 말, 4월 초. 메신저도 전화도 아닌 그저 편지나 엽서로만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를 유일하게 만날 수 있던 시간이 금지되면서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다. 이번 휴가 때 게으름을 잔뜩 피우며 편지 쓰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 다시 친구에게서 온 엽서를 보며 얼마나 스스로를 꾸짖었던가. (얼른 재개됐으면 좋겠다, 자유 여행)
나는 친구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면서 설터의 여행 속에서 나의 여행을 그려보곤 했다. 아아, 대체 여름이 뭐라고. 잔뜩 습한 공기, 햇살, 야외의 바비큐, 익어버린 모래사장, 그리고 점점 고요해지는 바다, 밤새 비워지지 않았던 차가운 화이트 와인. 여름은 계절의 끝에서 작별을 고한다. 내년엔 새로운 여름이 내게 자유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겠지. 나는 다시라는 말을 또다시 번복하며 여름을 기피하고 여름을 애타게 찾을 것이다.
제임스 설터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영원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아름다운 삶의 보상 -.
안녕, 안녕, 영원하지 못한 나의 여름, 여름아 안녕. 영원할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기에 아름다웠던 한 번뿐인 나의 올여름.
이제 곧이어 사라질 풀벌레 울음소리, 건조한 공기, 텅 비어버린 하늘, 차가운 풀내음 섞인 바람, 길고 짙은 저녁노을에 물든 첫 단풍과 낙엽 사이에 숨겨진 쓸쓸함 한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