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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빠의 육아

아빠의 육아 에세이를 시작하며

by 그레이
육아 선배는 말했다.
“두 돌쯤 지나면 좀 괜찮아질 거예요.”
그 말을 믿고 버텼다. 정말로 두 돌이 되니 아이는 통잠을 자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나보다 늦잠을 자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 시간은 왔다.

지금 나는 신생아 시절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 시절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텼을까?” 하고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살아남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회한과 경이가 동시에 담겨 있다.

아이는 자라고, 나는 질문이 깊어진다.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이 아이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들었던 때를 돌이켜보면 단연코 신생아 시절이다. 육아 선배들은 걷기 시작하면서 힘들었다고도 하고, 말이 트이면서 더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게는 분명히 100일의 기적이 오기 전 세 달의 시간이었다. 사람이 잠을 충분히, 이어서 자지 못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하루, 이틀 못 잔 잠이야 나중에 몰아서 자면 그만이지만 육아의 세계에 '나중에 몰아서'란 판타지는 없었다. 아이가 울어서, 기저귀를 갈고 수유를 하느라 깬 잠은 어쩔 수 없이 항상 부족했고, 부족한 잠은 언제 어디서도 충분히 채울 수 없었다.


좀비의 모습으로 회사에 출근해 비몽사몽 오전 근무를 하고 반쯤 눈이 감긴 채로 회사 수면실로 향했다. 인간에게 밥보다 시급히 중요한 것은 잠이라는 사실을 육아를 통해 새삼 느꼈다. 한 시간 남짓 수면실에 누워도 좀처럼 잠을 청하지는 못했다. 그저 눈을 감고 잠이 들지도, 깨지도 않은 반수면 상태를 거쳐 다시 일어나 오후 근무를 했다. 자리에 돌아가기 전 진한 커피 연료를 주유할 때 동료들이 물었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내게 신생아가 태어난 사실을 모르거나,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이들이 건넨 걱정의 인사다.

아이를 키워봤거나, 키우고 있는 동료들의 질문은 달랐다.


'아직 통잠 안자죠? 제일 힘들 때에요. 조금만 버텨요.'


공감의 인사와 걱정에 반가움반, 살려달라는 절박함반의 심정으로 나는 물었다.


'언제쯤 좀 나아지나요?'


육아 선배들은 보통 이렇게 답했다.


'백일 넘어서 통잠 자면 좀 나아질 거예요.

그런데 그 이후에도 원더윅스다 뭐다 새로운 힘듦이 올 거예요'


절박함 100의 마음으로 나는 다시 절규의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언제쯤 진짜 괜찮아지는 거예요?' (이 고문은 언제 끝나는 거예요?)

'음... 두 돌 정도 지나야 좀 나아질 거예요'


그 당시 두 돌의 아이를 키우고 있던 육아 선배의 말에 나는 부러움, 존경스러움과 동시에 과연 그 시절이 내게도 올까 하는 절망감도 들었다. 정말 두 돌이 되면 괜찮아지는 걸까 라는 의심도 있었다. 육체적으로 힘들다 보니 정신도, 일상도 연약해질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몇 달 전 내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던 두 돌의 시절이 왔다. 선배의 말대로 말도 못 하게 육아의 상황은 나아졌다. 통잠은 물론, 때로는 아이와 늦잠을 잘 수도 있다. 아이를 재우고 난 후 몇 시간 동안은 자유시간도 생겼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고통스럽던 신생아 시절이 그새 가물가물하다. 가끔 아내와 아이의 갓난아기 때 사진과 영상을 보면 불과 1, 2년 전인데도 둘 다 어렴풋한 기억이라고, 어떻게 키운 건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너무 힘든 시간이라 무의식에서 기억을 지웠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왠지 신생아 때가 그립기도 하고 벌써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팔뚝만 했던 그 시절이 아련하기도 하다.



아이가 조리원에 있다가 집에 온 첫날 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방에서 아이를 어깨로 안으며 느껴진 생명의 물질감과 경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때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내게 선물처럼 온 아이를 키워내며 느낀 것들을 글로 남겨보자고.


육아 선배의 말대로 아이가 두 돌이 지난 지금 조금 괜찮아진 게 맞는지, 이제야 노트북을 켜고 글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지난 시간 동안 글을 쓴다는 건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다. 이제 아이를 생각하며, 가족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는 것 자체로 벅차고 행복한 일이다. 어쩌면 지난 2년의 시간이 이미 머릿속에서 미화되어 재구성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고통의 망각마저도 육아의 한 과정이 아닌가 싶다. 지독하게 힘들었던 기억에서 이제는 육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미소가 번진다.


이제 두 돌이 지난 아이를 키우는 내가 육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더 왜곡되기 전에 남겨야 할 것 같다. 내게 육아는 소란스럽지만 진짜 사랑을 가르쳐주는 배움의 시간이다. 이 에세이는 부족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나로서 남기는 솔직한 기록이다.


아이를 키울수록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보다 '이 아이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고 분명해지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는 자신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스스로 물어야 할 물음이다.


갓난쟁이 시절
비몽사몽 수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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