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트-에쉬베리,카스트로에서 본 히피문화와 LGBT
골든게이트 파크 오른편으로 가면 하이트-에쉬베리(Haight-Ashbury) 거리를 만날 수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빨간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조형물도 보이고
다채로운 옷을 팔 것 같은 의류상점도 보이며
일반인들은 착용하기 힘든(?) 특이한 의류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상점도 볼 수 있다.
금융권 빌딩들이 솟아있는 샌프란시스코 중심부와 해안가에 위치한 피셔맨즈 와프와 다르게 이곳은 자유로운 느낌과 예술가들이 넘쳐날 것 같은 곳인데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이곳은 1960년대 미국에서 히피 문화가 유행할 때 성지라고 불렸던 곳이다. 히피라고 하면 기타를 들고 선글라스를 낀 채 장발과 덥수룩한 수염을 한 사람이 떠오른다.
히피문화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존 F.케네디 암살, 마틴 루터 킹 암살 등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청년층이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져갔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반전, 평화를 추구한 운동이다. 물질적인 요소보다 자연 상태의 모습을 지향하고 도덕과 이성보다는 자유로운 감성을 중시하는 문화이다.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로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샌들을 신거나 혹은 맨발로 걸으며 다양한 색깔의 옷을 착용하며 자신의 표현했다.
히피들은 이성보다 감성과 자유에 집중했는데 위 사상은 새로운 음악 분야를 창출했다. 바로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 이라는 장르인데 뚜렷한 특징이 있다기보다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보여주는 장르이다. (노래를 들어보면 굉장히 몽환적인 느낌이 난다) 히피는 감성과 자유에 집중하다 보니 마약에도 위 정신을 반영했다. 자유롭게 LSD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을 투여하다 보니 거주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빈번했고 캘리포니아 주는 LSD를 금지약품으로 지정해버렸다. 또한 이들이 만든 사이키델릭 록도 규제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히피들은 안신처를 찾아 이동하게 된다. 히피들이 정착한 곳은 바로 하이트-에쉬베리이고 여기서 공동생활을 하며 히피 정신을 이어갔다. 히피들은 1967년 6월 16~18일 3일간 골든게이트 파크에서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자신들의 정신을 음악으로 보여줬고 이에 공감해서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은 약 3만명 정도였다. 이 페스티벌에서 스콧 메킨지 (Scott McKenzie)는 'San francisco'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의 가사가 히피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bch1_Ep5M1s
<Scott McKenzie- san francisco>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당신이 만약 샌프란시스코에 온다면)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당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히피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은 꽃이다. 꽃은 반전,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스콧 메킨지의 노래 가사처럼 샌프란시스코는 평화의 상징 도시이고 이곳에 오면 꽃을 가진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Summer of Love라고 불리는 1967년 여름에 샌프란시스코에 약 10만명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히피 문화는 반전, 평화에서 시작해 친환경, 유기농,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미국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패션, 음악, 미술 쪽에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기존 미국 문화에 대한 반성과 대안 제시는 오늘날 평화시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자리를 이동해서 하이트-에쉬베리 거리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카스트로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카스트로 거리에서 명물은 바로 무지개색 횡단보도다
무지개색은 다양성을 의미하는 색깔이다. 그래서 LGBT의 상징적인 색으로 쓰인다. LGBT는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가 합쳐진 용어로 성소수자를 의미한다.
카스트로 거리는 성소수자들의 천국이다. 이들은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손을 잡고 걷거나 서로 애정행위를 나눈다. 주변에서도 전혀 이들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카스트로 거리는 어떻게 성소수자들의 성지가 될 수 있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세계 2차 대전 때로 가보자. 샌프란시스코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해군기지가 있던 곳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병사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전쟁 기간 동안 동거 동락했던 전우들 사이에서 동성애를 느낀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해버렸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가면 핍박을 받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기독교를 주로 믿는 국가인데 기독교는 동성애에 대해 배척한다. 그나마 배척이 덜한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주하면서 주변의 시선을 피해 동성애를 나누었지만 공개적으로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바로 하비 밀크다.
하비 밀크는 1977년에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된 미국 최초의 남자 동성애자이다. 하비 밀크는 그전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다가 1972년 자신의 연인과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하면서 커밍아웃을 하고 게이들의 인권 보호에 관심을 갖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결국 성소수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시의원에 당선되었고 1978년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의 협조를 받아 동성애자 인권 보장 조례를 통과시키는 등 게이들의 오픈된 삶, 게이들의 안전, 게이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 힘썼다. 하지만 이때 세상은 소수자에 대해 관대하지 못했나 보다. 하비 밀크와 조지 모스코니 당시 시장은 댄 화이트 전직 의원에게 암살당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성소수자들은 이에 격분하여 시위를 했고 하비 밀크의 지역구에 소속된 카스트로 거리에서도 잦은 데모를 했다. 특히 암살자인 댄 화이트가 적은 형량을 선고받자 성소수자의 분노는 극에 달았고 카스트로 거리에서 White Night riots이 일어났다. 1,500명 가량의 성소수자들은 카스트로 거리를 행진하며 댄 화이트 판결에 대해 항의했고 시위대의 숫자는 5,000명 가량으로 늘어나 샌프란시스코 시청까지 진격해 폭력적인 시위를 했다.
시위 당일이 1979년 5월 21일이었고 다음날은 하비 밀크의 49번째 생일이었다. 생일날 샌프란시스코 시민 약 2만명가량 모여서 그를 추모했고 그 해 10월에는 약 7만 5천명이 워싱턴 D.C에 모여서 성소수자들의 인권 보호와 차별 금지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하비 밀크 이후 성소수자 출신 의원들이 여럿 당선이 되었고 이들은 하비 밀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소수자들을 인권보호를 위해 일했다.
수십 년간의 성소수자들의 노력 덕분에 2001년 네덜란드에서 첫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고 미국에서도 2003년 매사추세츠 주법원이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판결을 하면서 다른 주도 합법화를 허용했다. 마침내 2015년 6월 26일 Obergefell v.Hodges을 통해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동성결혼은 헌법에서 보장받는 권리라고 판결했다.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노력 끝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었고 히피들이 기존 사회의 잘못된 점에 대해 저항하고 반전, 평화 사상을 퍼뜨릴 수 있었던 것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가 비주류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두고 이들을 보듬어 줬기 때문이 아닐까. 이 모든 일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던 것은 모두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샌프란시스코라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