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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Sep 18. 2024

잿빛

_ 허물어지다


 # 잿빛
  : 재의 빛깔과 같이 흰빛을 띤 검은빛.



살아감에 연연하다 허물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마음 비 내리는 밤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아득해집니다. 지난한 어둠을 뚫고 새어드는 아침을 무거운 눈으로 맞이하면 어깨는 내려앉고 마음은 잿빛이 됩니다.


온 힘을 다해 노력해 온 일이 무산되면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며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다 생각합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요. 그리하여 또다시 묵묵히 걷습니다. 그래야 그날이 와도 과감히 길을 접을 수 있으니까요. 최선을 다해 나아갔다면 결코 무용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들이 언젠가 다른 문을 열어줍니다. 멈추는 것 또한 담대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깊은 박수로 응원받아야 합니다.


자신만이 옳은 듯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숨이 막힙니다. 돌아갈 수 없는 관계라면 생이 버거워집니다. 그러다 생각합니다.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요. 누군가 제 길을 못 찾더라도, 비록 조금 멀리 돌아가는 듯 보여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내가 모르는 그만의 서사가 있을 수 있음을 상기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인생에 찾아드는 잿빛 시간들은 애면글면하며 견디어 냅니다. 하지만 풍파에 익은 어른이 되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 그것은 어떠한 분투로도 눌러 담을 수 없으니 그저 세월에 풍화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문득 삶으로 떠올라 일상을 흔들어 놓는 간극이 조금씩 줄어들겠지요.


얼마 전 다정하신 시아버님과 영원한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인 날은 하늘도 잿빛 구름 아래 슬픔을 토해냈습니다. 낯선 곳에 온, 낯가림도 많은 나에게 아버님은 늘 내 편이 되어 주셨어요. 항상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셨고 맛있는 반찬을 내 앞으로 밀다가 그릇이 떨어질 뻔도 했습니다. 산책 길에서 아버님과 벤치에 앉아 옛이야기를 듣던 오후가 하염없이 눈물을 흐르게 했습니다. 둘만 남으면 몰래 한 잔 하시던 아버님이 비밀로 해야 한다며 장난스레 건네던 '쉿'과 윙크도 말이에요. 시댁에 가면 아버님과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왜 진즉 말하지 못했을까요.


아버님의 영정 사진 속 정 많은 미소를 바라보다가 문득 사돈 좋아하시던 아빠가 마중 나오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또래의 젊은 아빠가 두 팔 벌려 아버님을 맞이해 주는 것 같은 모습이 그려지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홀로 계신 엄마가 떠오르며 울음이 터졌습니다. 아버님을 닮아 다감한 남편과 언젠가 나를 보내야 하는 딸들을 생각하자 자꾸만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빠를 먼 하늘로 보내드리던 이십 대 때와는 또 다른 통증이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게 허무하고 아파서, 아리고 쓸려서 온몸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밀도가 엉키며 정신은 우주를 유영하는 듯했습니다.


다시 일상이 찾아오려나 싶었는데 얄궂게도 이어지고야 마는 삶. 연연하다... 허물어지다... 끝내 살아가게 되나 봅니다.




* 2024.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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