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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Sep 11. 2024

약댓빛

_ 갈색 예찬


# 약댓빛
 : 낙타의 털과 같이 밝고 연한 갈색.



다정한 밤산책 길에 문득 바라보니 나무는 어느새 가을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을 견디느라 살피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니 비로소 나무의 빛깔이 보였나 봐요.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묵묵히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고개 숙여지는 마음입니다.


무슨 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갈색이라고 말해요. 봄을 타는 여자, 가을을 타는 남자라고 하던데 나는 가을이면 지독한 계절 앓이를 합니다. 봄은 오히려 슬퍼서 좋아하지 않았어요. 익숙함과 작별해야 하는 새 학년의 시린 마음과 달리 다채로운 꽃들의 향연은 아리도록 눈부셨으니까요. 반면 가을은 언제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약댓빛 옷으로 갈아입은 가을 나무는 마음의 파도를 잔잔히 다독이며 나를 안아 주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갈색 펜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일기와 편지에는 그 펜이 없으면 안 되었죠. 그다지 두드러질 것 없는 나에게도 색을 통해 나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던 거예요. 친구들은 그 색의 글씨만 보아도 그게 나라는 것을 이내 알아챘습니다. 지금도 마음을 담을 때는 갈색 펜을 꺼내요. 그 빛깔로 글을 쓰면 고요하고 안온한 마음이 됩니다. 글자의 온기가 삶을 데웁니다. 글씨체가 동그래지는 만큼 내 살아감도 동그랗게 되는 것 같아요. 그 따스함을 누군가에게도 건네고 싶어 자꾸만 갈색 펜에 손이 갑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약댓빛을 띠고 있네요. 책을 품은 나무 서가는 보기만 해도 마음을 녹여주고요. 마흔네 번 일몰을 본 날에 대한 어린 왕자의 슬픔에 울컥 눈물이 차오른 것은, 나 또한 그것이 내 마음에 노을을 내리기 때문이지요. 가던 길 잠시 멈추게 하는 커피의 브라운 향은 하루의 기운을 돋우어 주고 문장으로 마음을 데려가 줍니다. 그래서 나의 첫 책 표지도 약댓빛이 되었나 봐요. 가을이 되어 갈색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서면 보호막을 두른 듯 따스해집니다. 괜스레 기분 좋은 웃음도 나지요. 갈색 옷 하나로도 삶이 미소 지을 수 있다니 어지간히도 이 빛깔을 좋아하나 봅니다.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을은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고운 빛으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가을의 풍요로움은 곧 맞이하게 될 비움의 순간을 품고 있기에 더욱 찬란합니다. 늦가을을 재촉하는 가을비도 좋아요. 주목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제 길을 걷고 있는 11월. 가을의 눈부심과 반짝이는 12월 사이에 놓여 더욱 쓸쓸해 보이는 11월도 애틋합니다.


갈색은 색채 심리학에서 땅과 자연을 의미한다고 해요. 안정감, 편안함, 소박함, 순수함, 정직함 등을 뜻하는 동시에 고독과 쓸쓸함, 엄격함, 중후함, 가난, 자기주장의 강함 등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색에 담긴 심리를 살펴보니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있지만 삶을 톺아보는 재미가 솔솔 합니다. 색으로 마음을 담아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 빛깔 덕분이었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 2024. 9.3. 가을을 만난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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