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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Sep 04. 2024

개나릿빛

_ 엄지


# 개나릿빛
 : 개나리의 빛깔과 같은 노란빛.



개나릿빛을 닮은 친구가 있습니다. 열다섯 살에 만나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새하얀 피부에 빠알간 볼이 인형 같아서 그 아이를 닮은 '엄지 공주' 그림책을 선물하기도 했어요. 그때부터였습니다. 편지를 쓸 때도, 수십 년이 지난 내 휴대폰에도 그 작은 소녀는 '엄지'라고 저장되어 있어요. 엄지가 처음으로 웨이브 머리를 했을 때는 영화 '내 사랑 컬리 수'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컬리 수가 눈앞에 있는 듯했어요. 맑고 커다란 눈망울과 오뚝한 콧날이 예쁜 엄지는 대학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따뜻한 품성과 고운 마음에, 명석하고 지혜롭기까지 했으니까요.  


우리는 중고교를 함께 다닌 후 기쁘게도 같은 대학에까지 가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아리 활동도 함께 했고요. 나누었던 시간이 많은 만큼 추억도 마음 서랍 가득 들어 있습니다. 스무 살의 어느 날에는 서울역에서 남산 타워를 바라보며 "저렇게 가까운 걸 보면 걸어서 금방 가겠네."하고 걸은 적도 있어요. 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위에서 우리는 어이없는 문과적 사고에 웃음이 터져 가는 내내 깔깔 댔어요. KBS 공개홀로 음악 공연을 보러 걷던 길에서는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각각 아들과 딸을 낳아 결혼까지 하는 거 아니냐며 웃기도 했지요. 그런데 정말 우리는 딸 둘, 아들 둘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아이들도 같은 산부인과에서 낳아 문화센터 유아 수업에도 함께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들 어릴 때부터 가족 여행도 많이 가고, 크리스마스와 결혼기념일도, 송년과 새해에도 같이 나눈 소중한 시간들이 참 많아요. 그래서일까요. 만날 때마다 두 부부가 함께 할 이야기는 끊이지 않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들은 초등학교 선후배라는 공통점까지 찾아 뭉치더니 어느새 남편 친구 모임처럼 돼 버리기도 했지요. 아이들은 아빠들이 더 친구 같다고 까지 말할 정도예요.


30여 년을 가까이 살다가 이사 온 후부터는 엄지를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야 합니다. 그 덕분에 첫해에는 정말 오랜만에 손 편지를 써서 엄지에게 보내기도 했어요. 같은 동네에 살면 언제든 잠시 만나 도란도란할 수 있는데, 이제는 일 년에 볼 수 있는 날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하는 친구와는 만나는 순간부터 말간 웃음이 어우러집니다.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만 달라졌을 뿐 닮은 삶의 결로 살아가고 있어서 일까요. 다시 모여 흐르는 길은 어린아이 마냥 정겹습니다.

 

친구가 그 애 밖에 없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스치는 농담이었는데 그것은 내 삶의 관계를 돌아보게 해 주었지요. 맞아요. MBTI를 맹신하지는 않지만 INFJ인 나는 정말 그 성향에 대한 설명과 똑같습니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데 16가지 성격 유형 친구들 단체 사진 속에 인프제만 없는 거예요. 그 아이는 저 멀리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한참 웃었습니다. 누군가와 나누는 작은 시간에도 온마음을 다하려 애쓰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다행히 혼자 있는 게 외롭거나 힘들지 않고 평화로운 마음에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언젠가는 엄지와 카톡을 주고받다가 별다를 것 없는 톡에서 친구의 기운 없음이 보였어요. 걱정되는 마음에 “왜 그리 힘이 없어?”라는 톡을 보내자 엄지는 “너 내가 보여?”라고 답해 아울러 웃었지요. 나란히 보낸 긴 시간 덕분에 목소리는 물론이거니와 메시지의 짧은 문장만으로도 마음을 살피게 됩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다툰 기억 하나 크게 없네요. 어릴 때는 서운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바로 이야기하거나 편지를 써서 풀지 않았나 싶어요. 약속 시간에 먼저 도착하는 것도 같고, 헤어질 때면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돌아보기 하며 손인사 하는 것도 닮은 친구. 오랜 친구와의 만남은 그 어떤 사회적 가면도 필요치 않아 더없이 귀하고 고맙습니다. 특별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켜켜이 쌓아온 생의 무게를 덜어 낼 수 있지요. 엄지와 함께 호호 할머니가 되어 마시는 차 한 잔을 상상하니 또 이렇게 미소 짓게 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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