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옆구리사이로

by 털찐 냥이

너무 힘든 시간을 버티다 보면 내상을 입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느낌일까? 폭풍우 치는 언덕에 바람에 몸이 휘어져 서있는 사람이 있다. 큰 나무 밑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빗줄기가 따갑게 옷 속으로 치고 들어오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버티는 한 사람이 있다. 눈을 겨우 떠서 몸을 피할 자리를 찾고 바람을 피해 나무 기둥에 의지한다. 그리고 저 멀리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드디어 비구름이 몰려나간다. 거뭇한 하늘이 잠잠해지고 덜덜 떨리는 옷 길을 여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막상 걸음을 옮기려 하니 몸이 열덩이가 되고 어지럽다. 겨우 몸을 일으켜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아있는 힘이 없다. 한쪽 무릎이 바닥에 내리 꽂힌다. 어쩌면 내상이라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


'불행이 나만 피해 갈 리 없지' 그림책이 있다.

길을 걷다가 어깨를 툭 치고 갈 것 같은 일상에서 만나 본 것 같은 그림 속 주인공이 보인다.

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 넘어진다. 불행은 이때부터 전주가 흐른다. 예상치 못한 날벼락은 길을 걷다가 종종 만난다. 새똥에 몇 번 맞아본 나로서는 순간 떨어지는 그 뜨끈한 느낌을 안다. 머리카락과 엉켜 더러움이 잘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란... 오늘의 주인공은 새똥에 당첨이 되었다. 나들은 다 같이 어울려 화사하게 웃을 때 나는 혼자 어깨가 축 빠져서 걸었던 그 저녁의 기분을 밝음과 어두움으로 그림책은 설명해 준다.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빼꼼한 고양이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주인공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느슨한 관계로 등장을 한다. 그리고 행운이란 단어로 반전이 일어날 때 마치 깐부가 된 듯이 둘은 나란히 걷는다. 길고양이를 스토킹 하고 다니는 나로서는 둘이 만나는 장면에서 마음에 온수가 터지는 것 같았다.


불행이 나만 피해 갈 리 없지
그래 행운도 나만 피해 갈 리 없지


단순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뜻밖의 행운도 얼마나 많았던가 작은 이벤트에 응모했다가 당첨돼서 영화도 보고 문화상품권도 받고 우연히 누군가에게 친절을 받아 기분이 좋은 날도 있다. 그럼에도 나쁜 일이 있거나 기분이 상하는 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갑자기 어떠한 일이 생긴 날에는 '에휴 또 그렇구나'라면서 낙담의 콩알이 계속 굴러가서 눈사람을 만들어버린다.


세상의 불행이 나를 쏙 피해 갈 줄 알았던 어리고 어리석은 시간들이 있었다. 근거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감으로 능력치 이상의 세상을 부딪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치 얼음조각 저럼 깨져나가는 기분은 마치 비를 쫄딱 맞고 혼자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걸을수록 무거워지는 긴 머리와 옷, 신발과 양말을 적시는 축축함. 온몸에 서려오는 서러움과 추위.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는 뻐근한 목.

이런 기분이 또다시 들 때에는 "이까짓것!"이라는 말을 읊어본다. 이 말에 힘을 실어준 것은 그림책 '이까짓 거'이다.

한 여자아이가 하굣길 비가 오는 문 밖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본다. 우산이 없다. 마중올 사람도 없다. 이럴 때에는 같이 우산을 씌워줄 친구가 필요한데 그 마저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준호 녀석이 가방을 머리 위로 힘차게 들더니 빗속을 성큼 뛰어가더니 여자아이를 향해 소리친다 "넌 안 가냐?" 그래 같이 뛰어볼까? 여자아이는 같이 뛰기 시작한다. 문방구, 분식집, 편의점까지 같이 뛰어가고 피아노 학원에서 준호는 휘릭 가버렸다. 남은 길은 혼자 뛰어가야 한다. 그런데 아까 학교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마음이 어느덧 달라져있다. 혼자서도 잘 뛰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저 사나운 빗속을. 한 번 더 뛰어가도 잘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속으로 외쳐본다.


'이까짓 거!'


나는 그 표정이 좋았다. 다부지게 자신 있게 힘 있게 뛰는 모습이 좋았다. 창피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내면의 건전지가 가득 찬 든든한 표정말이다.

어린아이에게만 이런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다 자란 나에게도 이런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무언가 배우고 싶은데 미뤄두었던 것이 있다. 때 마침 다음 달에 시작이다. 서울 신촌까지 매주 가야 한다. 오래도록 경기도 남쪽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고향과 같은 서울이 낯설다. 빠르게 변하고 복잡한 서울을 애증 했는데 이젠 마치 절교한 친구처럼 안부를 궁금해하기도 어색하다. 할까 말까 일정과 장소를 다시 확인해 본다. 무엇을 타고 가야 할지 어디서 환승할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탐색을 해본다. 포기하면 마음이 참 편하다. '그래 다음에 하지 뭐...' 또다시 몇 년을 미루기에는 이젠 늙어간다는 공포가 다가온다.

'그래해보자! '

잘 못하겠지. 그래도 배우고 싶으니까.

내가 제일 나이가 많겠지? 그래도 한번 가보는 거지. 그러면 어때?


그래, 저 빗속을 달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다.

속으로 방금도 외쳐보았다. "이까짓 거,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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