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3학년. 떨어지는 성적과 달리 일본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즈음엔 명탐정 코난 말고도 정말 여러 애니를 보았다.
내가 당시 가장 좋아했던 건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애니였는데,
주인공이 어떠한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동생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
각 캐릭터가 무척이나 뚜렷하고 각자의 매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작품 전반에 철학적 질문을 툭툭 던지고 있다는 점 등을 좋아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때는 뭐, 콩깍지가 쓰여 있어서 그냥 1부터 100까지 좋았다. 어느 순간 좋음엔 이유가 없어지는 법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마음이지만,
즐겁고 행복한 시기였다.
세상엔 나와있는 만화가 너무너무 많았고
보면서도 또 다른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죽음'이란 단어를 무던히도 싫어하고 기피하던 시기라,
나중에 애니의 다음화를 못 보면 안 되니까 죽을 수 없겠지?라는 얼토당토않는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30대가 되어 이렇게 글로써 내놓을 줄은 몰랐지만)
일본에서는 보통 새벽에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데, 지금처럼 ott가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어서 다음날 올라오는 애니를 보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어느 누군가 퍼 온 영상에 자막까지 구해져 있노라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느님! 이 되어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나 역시 좋아요... 를 누르기는 수줍어서 그저 마음속으로 감사만 했다. (여담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티를 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랐습니다. 이제와 서지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쨌든 여러 경로(?)를 통해 나는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애니를 봤다.
오래되어 완결이 난 것부터 시작해 매주 방영하는 최신화까지. 또 그것을 모두 보았을 때는 엄청 옛날 애니까지( ex. 다다다, 아이들의 장난감 등 ) 섭렵했다.
중2병에 걸린다는 중학교시절, 나는 스스로에 취하지 않고 그저 화면 너머 주인공에게 이입했다.
공감력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그 모든 게 어우러져 나의 내면에 일종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이야기는 무엇이기에 이토록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걸까.
왜 단지 그들의 이야기임에도 나는 위로받고 웃고 우는 걸까.
그건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지금에 와서 내가 본 애니, 책, 드라마, 영화의 모든 내용이 기억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내가 본 그 무수한 이야기들이,
나를 살리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