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인터라켄 툰 호수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이런 날은 몸을 쉬게 해서 좋은 날이다. 그럼 이런 날은 어떤 날인데? 산 넘고 물 건너 이리저리 리프트 타고 돌아다니지 않는 날인데. 이구, 여기서도 푸니쿨라를 탄다. 그리 복잡하지 않게 한 번만 오르고 한 번만 내린다. 여긴, 진짜 관광지다. 관광지. 그렇다고 관광을 비하하지 마시라. 무거운 배낭과 등산 스틱을 팍팍 찍으며, 두툼한 등산화를 신어야만 자부심이 뿜뿜 나온다면 글쎄다. 글쎄!
자부심이 나쁘기야 할까? 일정을 내가 짠 것도 아니고, 이걸 따르겠다고 선택한 상품이 이렇다니. 언제부터인가 TMB(Tour de Montblanc 투르 드 몽블랑)를 하고 싶었다. 프랑스 땅 샤모니에서 출발해서 유럽 최고봉 몽블랑을 둘러서 걷는 둘레길 트레킹. 전체 170km를 걷는 투르 드 몽블랑을 했으면 했었다. 이때 못 간 사정을 사람일 뜻대로 안 된다고 하면 좀 거창하긴 한데, 맞긴 맞는 말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6월 초에 예약을 했는데, 그해 그때 눈이 많이 와서 루트가 폐쇄되어 못 가기도 했고.
어떤 해는 집에 큰 우환이 닥쳐 부득이하게 취소하기도 했고, 한 번은 회사에서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부득이하게 취소를 했었다. 인사가 나자마자 지방에 가지 않고 해외로 나갈 수는 없으니. 중요한 건 소소한 비용만 잃었을 뿐. 주관을 했던 샤모니 소재 등산 회사에서 아주 합리적으로 일 처리를 해준 덕분이다. 그래서 꼭 TBM를 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하면 되지 하고 쉽게 선택했다가. 한 번은 코로나가 시작되어 역시 못 가면서 진짜 세상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를 뼈저리게 깨달은 후, 3년을 기다린 끝에 해외에 가려니.
시장이 변했다. 고객의 트렌드가 바뀐 것이다. 어느 순간 TMB보다 알프스 3대 미봉과 돌로미티 알타 비아 트레킹이 주가 된 것 같았다. 이럴 때 소인은 시류를 따르는 것이 처세라서. 참 큰 깨달음(?) 이긴 하다. 1타 3 피로 선택한 것이 한 번에 알프스 3개의 봉우리를 보는 것이다. 1타 3 피는 몽블랑, 마터호른, 융프라우 3곳을 한 번에(1타) 둘러본다는. 이러니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걸 하기로 결정한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세상에 둘러볼 곳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스위스 온 김에 한 번에 끝내자는 얄팍한 생각. 그런데 현명한 생각 같다. 스페인, 오스트리아, 조지아, 티베트 등등. 트레킹을 해보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이곳 하더쿨룸에 들르는 결정적인 이유는 오늘 체르마트에서 도착한 날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나절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하더 쿨룸이 볼 것이 없었을까? 이곳 하더 쿨룸이 유명한 것은 전망대 때문이다. 그곳에서 내려보는 경치 또한 인터라켄을 대표한다. 정면으로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볼 수 있고, 내려다보면 왼편엔 브리엔츠 호수와 오른편엔 툰 호수가 펼쳐져 있다. 이거다. 굳이 높이 올라가지 않아도 이런 명품 장면 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산과 호수라니. 이 절묘한 결합!
이곳에 오르기는 아주 쉽다. 걸어서가 아니라면. 8분 정도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푸니쿨라를 타면 된다. 경사는 64도 정도 된다던데. 아쉬운 건 날씨가 쨍하지 않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왔는데 비 오고 구름 껴봐라. 이날 나중에 비 오고 구름 꼈었다! 여긴 겨울에도 올라올 수 있을 것 같다. 저 아래 보이는 호수 색깔과 하얀 설산과 녹음까지 우거져 참 조화롭다. 스위스 이 나라는 참 복도 많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드니. 그건 그렇게 저녁을 각자 해결해야 해서 내려가자마자 밥을 먹기는 그렇고.
좀 더 걷기로 했다. 방향은 툰호(Thunersee). 브리엔츠 호수는 안 가고? 뭐 특별한 뜻은 없다. 호수 이름이 왜 툰호인가 봤더니 호수 끝 도시 이름이 툰이다. 방향을 틀어서 걷는데, 찻길 말고 호수 바로 옆에 작은 소로가 나있다. 호수 따라 걷는 맛이라니. 그런데, 호수 유속이 빠르다. 여기서 수영했다가는 그냥 물에 쓸려갈 것 같다. 그러니 아무도 수영하는 이가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에 역시나 점점이 패러글라이더들이 떠있다. 이 근처 어디로 이동에서 그곳에서 내려온다던데. 그러니 우리는 올려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툰 호수를 걷다 만난 꼬마 친구들! 카메라를 들이대니 자기들도 들이댄다. 서로 반갑게 손을 흔들고, 그중 한 명은 내게 달려와 젤리를 한 움큼 손에 줘주었다. 오호! 그저 땡큐다. 그냥 젊어진 기분이다. 동심. 그렇지. 저건 애들 마음이다. 누가 어른이 그러겠는가? 아마도 이쪽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것 같지 않다. 인터라켄 중심가에서 머물 듯. 이렇게 인터라켄 속살을 들여다보는 외지인들이 얼마나 될까? 호수 주변은 역시나 부자들이 사나 보다. 집들이 다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었다. 곳곳에 성당이 있어 가다 쉬다 둘러보다 그렇게 걷다가.
결국 툰까지 가지 못했다. 일기예보가 정확했다. 엄청난 비를 만난 것이다. 하더 쿨룸에서도 날씨가 흐렸는데, 돌아갈 때까지 비가 덜 오길 빌었건만. 기도발이 약한 거다. 어쩌겠는가. 돌아가야지. 날씨가 춥지 않아 비 맞는 느낌도 상쾌하고. 동행한 선배가 다행히 판초 우의가 있어 방수 재킷을 빌려준다. 이것도 여행이다. 결코 싫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역시나 걸어야 제대로 보인다. 걸으니 꼬마 친구들과 짧은 만남도 이뤄지고. 이 집 저 집 둘러도 보고. 걸어야 세상 속으로 세상을 더 볼 수 있으니, 앞으로도 더 걷고 있지 않을까? 어디든. 여기저기 쏘다니는 상상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