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동시대 아카이브 작업의 조상님이라 할 수 있는 이유
2021년 9월 18일부터 10월 3일까지 16일 동안 파리의 기념비 중 하나인 개선문이 거대한 천으로 뒤덮였다. 반짝이는 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폴리프로필렌 천 25000 평방미터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3000미터 길이의 붉은 밧줄이 개선문을 하나의 선물로 포장해 놓았다. 파리에서 자동차 통행량이 가장 많은 악명 높은 회전 교차로는 16일 동안 보행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포장된 개선문(Arc de triomphe, wrapped)>은 수십 년간 전 세계의 기념비들을 포장(wraping)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크리스토-잔 클로드가 마지막으로 파리 시민들에게 남긴 선물 같다. 이 프로젝트가 마지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초 2020년으로 예정되었던 작품의 전시는 코로나로 인해 2021년으로 미뤄졌고, 이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사이 크리스토는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임종의 자리에서 크리스토는 이 작업을 그대로 진행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의 파트너이자 공동작가인 잔은 2009년 별세) 그리고 작품의 설치기간 역시 16일로 명시했다.
비록 크리스토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그의 세세한 계산을 거치지 않은 공정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젝트는 무려 1961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온, 아마 작가 스스로도 실현될 것이라 확신할 수 없던, 긴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60년간 이 하나만을 구상해 온 것은 아니다. 이미 다양한 도시의 여러 기념비를 거대한 선물로 만든 전력이 있다.)
지난 주말 개선문 앞에서, 공공 미술 혹은 대지 미술 작업은 이제 그 의미와 메시지보다는 '인스타그래머블리티'-클레어비숍이 래디컬 뮤지엄에서 주장했던-가 더 중요한 성공의 척도가 되었음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잔 클로드가 자신들의 노동과 결과물을 통해 전달하고 싶던 자유로움과 유희를 교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작품의 제목 옆에 기입되는 제작 연도가 흥미롭다.
1961년부터 2021년까지 장장 60년이 기록되어 있다. 1961년은 크리스토-잔 클로드가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작품을 시작한 해이고, 이듬해인 1962년에 이미 크리스토는 포장된 개선문의 이미지 스케치를 시작했다.
1985년 10년에 걸친 준비 끝에 대중에게 선보였던 <퐁뇌프 포장> 프로젝트에 이어 파리 시민들은 두 번째로 포장된 기념비를 마주하게 되었다. 좀 달라진 점이 있다면, 85년 당시에는 시에서 허가를 받는 과정이 가장 길었던 반면, 이번 프로젝트는 크리스토에 관한 전시를 준비하던 파리 모던아트 미술관의 관장, 프랑스 국립 유적 및 기념물 센터 장 등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85년의 대중들은 퐁뇌프에 나와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이것이 예술작품인가" 논쟁을 벌였다면, 2021년의 대중들은 누구도 '작품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크리스토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이름 표기도 주목할 만하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Christo et jeanne-Claude)가 공동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작업이 삶의 동반자이자 매니저이자 공동 기획자였던 잔 클로드와의 협업이었기 때문이다. 공공장소 특히 기념비적인 장소에 설치되는 모든 작품들이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지역의 담당 기관에 법적인 허가를 받는 것이고 그에 따른 행정절차를 진행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자기 건물에 구멍도 제대로 뚫기 어렵다는 파리가 아닌가.. 또한 작품의 설치에 뒤따르는 안전문제와 적합한 재료를 찾고 설치하고 철거할 수 있는 기술자들을 섭외하는 일도 그렇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예술적 작업이 아닌 산업과 행정, 장인의 손이 만나는 교차점에 있다.
크리스토에게 있어 작품의 제작은 천재적 아티스트가 아무도 모르는 작업실에 오롯이 혼자 숨어서 하는 일이기보다는 아티스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상상적인 대상을 다양한 형태의 노동의 빌려 유형의 물질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토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가진 '협업의 특징' 잘 이해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해 굉장히 정밀하게 기획하는 이라고 할 수 있다. 아티스트라는 이름이 가진 아우라를 활용하기보다 벗어던지기를 택한 듯 보인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스타 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그 작품들이 다른 형태의 상품으로 팔려나가는 것과도 대조적이다.
작가의 죽음과 함께 끝난 60년 간의 프로젝트
공공미술과 대지미술이 마치 텔레비전 광고처럼 흔해지고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감동을 주지 않는 2021년에 크리스토와 잔-클로드가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자신들만의 '독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들은 가장 새로운 방식이 아닌 가장 클래식한 정체성을 가진 동시대 작가들이 아닐까. 여전히 고집스럽고 고지식하게도 미적이고 공공적인 작품을 전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제적 독립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프로젝트 내내 일체의 외부 후원을 받지 않는 작업을 했다. 모든 프로젝트에 사용된 일체의 재료비와 작업비는 아티스트 스스로 부담해왔다. 이는 크리스토-잔 클로드 작업에서 아주 중요한 원칙인데, 이 어마어마한 재료비와 노동비를 크리스토의 회화, 콜라주, 사진 작업 등을 판매한 비용으로 충당해왔다. 한번 사용했던 재료들 (주로 천과 줄, 각종 안전장치들, 설치장비들)은 환경, 경제적 이유로 모두 다음 작업에서 재활용한다. 대도시의 공공기관에 의해 초청을 받으며 활동하는 '거대해져 버린' 작가가 100% 사비로 작업활동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예술가의 독립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크리스토의 의지였다고 한다. 자본에서 독립하지 못하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의 프로젝트는 예술가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의지뿐 아니라 예술작품이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고, 사고파는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작가의 고집이 담겨있다. 크리스토에 따르면, 그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상할 수 있고, 만져볼 수 있고 그 안을 지나가고 밟아 볼 수 있는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어야 한다. 도덕 교과서에서나 찾을 수 있을법한 이 고리타분한 원칙이 역설적으로 그의 자유로운 사유와 작품의 원천이었겠지.
승리라는 공통의 기억과 기념, 과시가 뒤얽힌 개선문의 맥락과 역사를 지워버리고
행진하는 군사들과 나폴레옹의 월계관을 숨겨버리고,
결국 이 역사적인 기념물이 동시대의 개인에게 부여하는 감각적인 경험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어쩌면 동시대 아카이브적 작업들의 조상님 정도 되지 않을까.
연결된 글.
https://brunch.co.kr/@eyeonho/58